세계 D램 업계가 또 한번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휩싸일 것인가.
최근 예상치 못한 가격하락으로 D램 업체들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지난 90년대말 구조조정을 통해 삼성전자, 현대전자, NEC-히타치,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4사로 재편된 D램 업계 판도가 또 다시 격랑을 탈 것이라는 관측이 업계 한쪽에서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현 추세라면 가격하락을 불러온 D램 공급 과잉이 6개월∼1년 정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으며 어떤 형태로든 업계 구도에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츠, 모토로라, 일본의 미쓰비시, 후지쯔 등의 시장 퇴출과 몰락을 불러왔던 90년대 하반기의 「악몽」이 되풀이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라는 반론이 아직 우세하나 D램 업체들은 「추운 겨우살이」에 대비한 체력 보강에 들어갔다.
◇도전과 응전=지난해 통합 법인으로 출범, 마이크론을 제치고 2위에 등극했던 현대전자는 막대한 부채 부담과 최근 제조원가에 근접한 가격하락에 휘청거리고 있다. 2위자리 수성도 벅찬상황이다.
현대전자의 지난 3분기까지 매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8000억원 안팎에 이를 이자비용 부담으로 64MD램의 제조원가는 4달러 후반, 128MD램은 9∼10달러일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달말 현대전자가 대형 PC업체와 합의한 64MD램 공급가격은 5달러 후반, 128MD램 11달러다. 가격이 1달러 이상 더 내려가면 출혈 판매가 불가피하다.
통상 2주마다 열린 가격협상이 최근 1주로 당겨진 것에서 보듯 고정거래선에 대한 가격은 앞으로도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대전자는 다행히 3분기에 660억원의 흑자를 냈으나 빚을 갚는 데 써야 해 앞으로 6개월 정도는 힘겨운 시절을 보내게 됐다.
반면 마이크론은 올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바탕으로 2위 탈환에 나섰으며 NEC와 히타치는 합작사인 「엘피다메모리」를 본격 출범시켜 한국업체를 향한 대공세에 들어갔다.
마이크론은 지난 8월말로 끝난 회기연도에 반도체 매출이 전년 대비 140% 성장했다. 9월 이후 D램 매출감소를 고려하더라도 올해 D램 분야에서 70억달러 안팎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 10억달러의 차이를 보였던 현대전자 매출에 엇비슷하게 근접하거나 심지어 추월하는 이변을 일으킬 전망이다.
엘피다메모리의 총공세도 거세다. 이 회사는 사업 초기부터 256MD램 등 대용량 제품 위주로 시장을 공략키로 하고 최근 샘플공급에 들어갔으며 내년초부터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특히 엘피다는 경쟁사에 앞서 0.13미크론 공정을 적용키로 해 국내 업체들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다.
NEC와 히타치는 엘피다를 앞세워 차세대 D램시장을 선점하고 각사는 플래시메모리 등 전략상품에 집중, 삼성전자에 빼앗긴 메모리산업 패권을 하루빨리 되찾는다는 야심이다.
◇느긋한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최근 D램시장의 위축이 자사에 결코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PC시장의 위축과 이에 따른 64MD램의 퇴장을 예상, 이미 서버용과 128MD램, 246MD램, 램버스 D램, 더블데이터레이트(DDR) SD램 등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생산구조를 개편했다. 또 64MD램 시장도 그래픽 등 경쟁자가 드문 품목 위주로 사업을 전개해 가격하락과 무관하게 수익을 창출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오히려 시장 위축이 자사의 시장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
경쟁사에 비해 높은 원가 경쟁력으로 가격경쟁에서 유리한 데다 거래선들이 내년 하반기 이후 시장이 회복되면 안정적인 제품 조달을 위해 대형업체에 대한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삼성전자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 내년 하반기 이후 급증할 D램 수요에 적극 대응할 수 있어 업체와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넓혀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 회사도 엘피다나 독일 인피니온 등 256MD램 시장을 선점하려는 일부 경쟁사들의 행보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망 =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가격 하락에도 불구, 적어도 올해까지는 삼성전자, 현대전자, NEC-히타치, 마이크론, 인피니온 등으로 이어진 업계 판도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렇지만 내년에는 뭔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 2∼4위 업체 사이에 2위 자리를 놓고 사활을 건 대결이 벌어지고 그 승패에 따라 업계 순위도 바뀔 것이라는 관측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내년 중반 이후 늘어날 수요에도 불구, 가격 하락세는 내년 하반기초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경쟁에서 이기는 업체는 사실상 삼성전자와 함께 2000년대 초반 D램시장을 양분하게 된다.
또 상위업체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하위권에 포진한 일본과 대만의 D램 업체들은 시장 퇴출의 갈림길에 설 것으로 예상된다. 하위권 업체들은 합종연횡 또는 파운드리 등으로 사업을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두고 업계는 상위 5∼6개사에서 일부 순위 변동이 있을 수 있으나 이들 업체의 시장 지배력은 1∼2년후 점유율 80%에서 90% 이상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황창규 삼성전자 메모리부문 대표는 『시장 환경이 급변하면서 앞으로 D램 업체간 경쟁은 제품력은 물론 차세대 기술력과 시장지배력을 포함한 종합적인 경쟁력에 따라 새로운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D램 업체들의 생존 경쟁과 이로 인한 2차 구조조정이 본격화한 것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