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책임질 사람은 없는가

이현덕 논설실장 hdlee@etnews.co.kr

가을의 끝자락이다. 들판의 가을걷이도 거의 끝났다. 그래서 약간은 썰렁한 느낌이 든다. 이미 첫서리도 내렸다. 한껏 자태를 자랑하는 단풍도 머지 않아 그 모습을 감출 것이다. 앙상한 나무가지만 남겨놓고 잎은 모두 뿌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자연의 이치니까.

요즘 사회 전반에 걸쳐 불안심리가 팽배해 걱정이다. 모두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계속 터지는 각종 악재로 인해 우리 경제는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중심을 잡을 수 없다. 주식시장에서는 그야말로 널뛰기 장세가 연출된다. 심지어 증시전문가조차 장세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자탄한다. 자칫하면 우리가 제2의 IMF사태를 맞이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하는 모습이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만 봐도 그런 시각을 가질 만하다. 의약분업사태는 아직 타결점을 찾지 못한 채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한빛은행 불법대출사건이 터지더니 동방·대신금고 불법대출, 한국디지털라인 사장 구속, 리타워텍 주가조작 조사, 동아건설 퇴출 결정, 현대건설 1차 부도 등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내일은 정부가 부실기업중 회생가능성이 없는 퇴출기업명단을 발표할 예정이다. 일시적인 시장충격이 예상되지만 이번 기회에 부실기업에 대한 정리를 끝내겠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그러나 사전에 예방적 조치는 취할 수 없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꼭 문제가 터져야 서둘러 대책을 내놓으니 하는 말이다.

정부는 그동안 각종 사고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대책을 마련해 내놓았다. 문제는 정책의 실효성 여부다. 지난해 여름 대우사태 이후 지금까지 정부는 20여 차례 금융안정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번 결정된 정책은 지속적으로 일관성있게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에 대한 불신감만 누적된다.

가령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면 우선적으로 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의사가 환자의 발병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올바른 처방전을 발급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신속하게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만다. 자칫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결과를 불러 온다. 때를 놓치면 수습하는데 힘이 두 배 이상 들고 효과는 상대적으로 반감하게 마련이다.

정확한 현실 진단 위에 대책을 마련하고 원칙에 따라 집행해야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제1차 금융구조조정이 기대 수준에 크게 미달했고 추가로 공적자금 40억원을 투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국민들을 더 속상하게 하는 것은 워크아웃기업과 법정관리업체의 경영행태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업체가 경영자의 고급승용차를 구입하거나 자신들의 임금을 올리는데 자금을 사용했다면 어느 누구인들 이같은 행태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이 이들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면 하나같이 『앞으로 시정하겠다』거나 『나중에 기회를 주면 소상히 설명 드리겠다』는 식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만약 잘못된 점이 있으면 남들이 뭐라하기 전에 당당하게 책임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고위공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말 이제는 소신있게 일하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지는 사람을 보고 싶다. 지금까지 109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지만 자신이 잘못 처리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꿀먹은 벙어리다. 잘한 일은 자신이고 못한 일은 묵묵부답이다. 게다가 금융기관을 감독해야 할 사람이 금융비리에 관련된 불행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런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이제부터 추진하는 정책은 소신과 책임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주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위기국면을 극복하고 재도약의 디딤돌을 밟을 수 있다. 나무도 가을이면 잎이 땅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자신에게 역할이 주어졌을 때 국리민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공직자와 기업인이 많아야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