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제부 이윤재부장 yjlee@etnews.co.kr
정현준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젊은 벤처인의 도덕적 타락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개탄했다고 한다. 상당수 벤처인은 『정현준은 벤처인이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벤처기업협회는 『정현준은 벤처기업가가 아니라 사이비 금융전문가』라고 공식적으로 규정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정현준 사건은 아직도 벤처업계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융감독원 담당국장이 코너에 몰리다 자살하는가 하면 부원장보까지 전격 연행조사를 받고 있다. 단순한 한 벤처인의 개인 비리차원에서 개혁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금감원의 도덕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도덕성까지도 까발려지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젊은 벤처인의 도덕성을 개탄하는 국정의 도덕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벤처기업협회가 이번 정현준 사건을 규정하는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코스닥시장에서 유망벤처기업으로 부상한 한국디지탈라인(KDL)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던 협회가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공식입장을 표명한 것이 겨우 벤처기업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정현준을 사이비 벤처로 규정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 상황에서 정현준 개인이 벤처인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특히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에 관한 한 정부, 벤처, 더 나아가 그룹 총수나 언론,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누가 누구에게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벤처인의 도덕성을 따지기보다는 벤처 비즈니스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검토해야 할 때라고 본다. 이번 정현준 사건 자체가 벤처 비즈니스 과정에서 나타났음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벤처 비즈니스는 잘 알려진대로 기본적으로 「모험」을 수반한다. 모험이 따르는 만큼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벤처다. 모험이란 자금이나 경영능력, 마케팅 등 어느 한 부분의 능력이 부족해 사업을 추진하는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 정현준 사건은 우리에게 몇가지 시사하는 점이 있다.
우선 정현준씨의 도덕성 유무를 떠나 정현준씨가 2∼3년 만에 어떻게 거금을 만들었는지 그 과정이 중요하다. 알려진대로 정현준씨는 거의 무일푼으로 별 다른 모험이나 리스크 없이 몇년 만에 수천억원을 벌어들였다. 수익이 높으려면 위험도 그만큼 커지는 게 금융의 본질이고 벤처 역시 그렇다. 문제는 정씨와 같은 사람이 우리 벤처업계에 너무 많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정씨와 같이 별 위험을 수반하지 않은 채 고수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간과해선 안될 부분이 우리 모두가 벤처를 육성하는 데만 신경을 써왔지 제대로 잘 육성하는지 감시하고 바른길로 인도하는데 인색했다는 점이다. IMF이후에 벤처는 우리경제의 희망으로 간주돼 왔다. 정부도 벤처강국을 위한 파격에 가까운 지원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 정현준 사건이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벤처를 악용한 사이비 벤처인들을 걸러내는 사후관리가 부실했다.
특히 정부는 벤처 2만개 양성에만 온통 신경을 썼을 뿐 사이비 벤처와 사이비 벤처기업가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지 못했다. 이는 결국 일부 사이비 벤처로 인해 다수의 벤처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을 조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벤처 인프라문제 또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정현준 사건으로 우리 벤처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도 우리 벤처인프라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선 자금시장을 보더라도 벤처기업의 젖줄인 벤처캐피털이나 엔젤들이 취약하다. 창투사만 150개를 넘을 정도로 양적으로 많지만 진정 벤처를 아끼고 육성할 만한 마인드를 갖고 있는 곳은 드물다. 엔젤 역시 말이 「천사」이지 벤처 육성을 위한 지원보다는 단기 자본 이득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은행, 증권, 투신, 보험 등 기관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우리의 벤처산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난 1년간 우리는 벤처산업의 극과 극을 체험하면서 앞으로 우리 벤처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해 직접 눈으로 보았다. 법상 벤처가 7000개를 넘었다고 하지만 벤처의 기본정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벤처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냉정히 살펴봐야 한다. 또 이땅에 벤처의 뿌리가 탄탄하게 내릴 수 있도록 정부나 기업은 물론 우리 모두가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