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넷월드+인터롭」쇼에는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 2곳이 부스를 마련, 전세계 바이어를 상대로 자사 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부스 방문객의 대부분은 출품된 장비에 관심을 가진 고객들이었으나 벤처투자자의 발걸음도 적지 않았다. 이번 행사 진행을 위해서 한국에서 건너간 관련회사 관계자는 『부스를 방문한 벤처투자자들중 상당수가 투자의향을 밝혀왔다』면서 『그러나 국내를 대표하는 통신장비업체인데 해외에서는 아예 알려지지도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고 언급했다.
그동안 정부와 함께 음성국설교환기(TDX) 국산화, 코드분할다중방식(CDMA) 이동통신 단말기 세계 최초 개발 등을 통해 종합통신 장비회사로 성장한 국내 대기업들은 인터넷 인프라 장비분야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네트워크 장비분야의 경우 국내 벤처기업보다도 뒤처져 제품을 출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며 한때 자체 장비개발보다도 해외 장비를 들여다 파는 사업에 치중하기도 했다.
광통신장비 분야는 광가입자망장비(FLC)와 소용량 광전송장비를 제외하고는 동기식디지털계위(SDH)와 고밀도파장분할다중화장비(DWDM) 등과 같은 기간망 장비의 대부분을 해외업체에 고스란히 내주었다.
이동통신단말기를 제외하고는 통신기기 수출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전에는 TDX를 동남아나 동유럽 지역에 판매하기도 했으나 정부지원금이 없어지면서 대부분 음성교환기 수출사업에서 철수한 상태다.
다만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과 케이블모뎀 등 초고속인터넷 장비의 내수판매 호조와 수출전망이 밝은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90년대 중반까지 국내 종합통신장비업체들의 미래는 그렇게 비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TDX사업 호조를 바탕으로 데이터통신, 광전송 장비를 집중 육성, 초기 시장을 선점하는 등 소위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IMF를 맞으면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회사 경영진이 수익성 위주로 투자우선순위를 매기면서 인터넷 인프라 장비사업분야는 찬밥 신세로 몰락했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IMF 이전까지는 회사내에서도 도전해 보자는 의욕이 넘쳤다』라고 설명했으나 『IMF 이후 분위기는 반전됐고 그 결과 2년동안 이 분야에 대한 투자는 사실상 중단됐다』고 밝혔다.
그는 『2년여 동안 투자 중단의 결과는 현재 인터넷 인프라 장비분야에서는 어디서부터 손써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전체 기반이 무너진 셈』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회사 방침에 실망, 2년 사이 많은 인력들이 대기업을 떠나 벤처나 해외 다국적 기업으로 이직했고 현재는 심각한 기술인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아직까지 인터넷 인프라 장비분야 육성에 대한 어떠한 마스터플랜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년 사이 시스코나 노텔 등과 같은 해외 경쟁사들은 세계 10대 기업으로 성장할 만큼 거대화 됐고 대기업들도 이들 업체와 경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10여년 동안 정 들었던 대기업을 떠나는 한 마케팅 전문가의 지적은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음미할 만한 대목이 많다. 『이제 중장기 개발계획은 극소수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당장 내년을 위한 연간 단위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지요. 중장기 계획과 투자가 집행되지 않는 한 인터넷 인프라 장비분야에서는 영원히 주변국으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