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대계 다시 짜자>3회-벤처정신 되살리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에는 벤처기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기업이나 다른 벤처기업이 개발해왔던 제품을 좀더 싸게 개발하는 것이 국내 벤처기업의 현주소입니다. 미국의 예처럼 모험정신을 바탕으로 아무도 선보이지 못한 제품을 개발하는 벤처기업의 모습은 어쩌면 국내에서는 요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국내 유망 벤처기업에 몸담고 있는 한 임원의 고뇌다. IMF 초기만 해도 통신분야 벤처기업은 제몫을 못하는 대기업의 역할을 대신해 줄 대안으로 업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대기업 조직의 비효율성, 의사결정의 지연, 무원칙한 투자축소 등을 몸소 체험하고 벤처기업에 합류한 초기 멤버들은 「한번 해보자」는 열망으로 수시로 밤을 새우면서 일했다.

그 결과 일부 벤처기업은 대기업조차 못했던 제품을 개발,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 거대 다국적기업이 점령해 온 시장을 빼앗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벤처기업의 한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벤처기업의 핵분열을 들 수 있다.

네트워크장비나 통신장비 분야의 벤처기업이 주식시장에서 각광받기 시작하자 일부 벤처기업 직원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다른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기술진의 대거 이동으로 기술진이 빠져나간 벤처기업은 제품개발을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했으며 또 도덕성 논란도 발생했다. 벤처기업의 핵분열은 무엇보다도 한정된 기술인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분산시키면서 선발 벤처기업나 후발 벤처기업 모두 기술력 약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라우터 관련 핵심기술 엔지니어는 불과 몇명에 지나지 않는다』며 『국내 기술수준을 보건대 국내에서 10여개에 이르는 라우터 개발·제조사 수는 라우터 관련 엔지니어들이 모두 분산된 반증』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기술인력 분산은 선발 벤처기업에는 신규 제품 개발여력을 약화시키고 후발 벤처기업에는 기존 제품의 단순 기능향상 제품개발로 이어져 전반적인 기술력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했다. 또 시장경쟁이 심화돼 선후발업체 모두 수익기반이 크게 악화돼버리는 상태를 맞이했다.

벤처기업 CEO들의 자질문제도 제기된다. 엔지니어 출신이 대부분인 통신분야 벤처기업 CEO들은 사업성장에 따라 다양한 시각과 경영전략을 마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술에만 집중해 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100억원대, 1000억원대 매출에서 분명 CEO의 역할이 달라져야 함에도 이전 경영방식을 고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코스닥에 등록하면서 당초 품었던 벤처정신을 망각하는 CEO도 심심치 않게 발견됐다. 모 업체는 사업과 관련없는 연예사업에 뛰어들어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 또 다른 업체는 자체 장비개발보다는 쉽게 매출을 올릴 수 있는 해외장비 유통사업에 힘을 싣는 사업전략을 수립, 직원과 의견마찰을 빚기도 했다.

『해외업체에는 기본적인 성능과 가격만을 따지던 통신사업자가 국내업체에는 아주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댑니다. 명백한 역차별이지요.』 『주주들이 연 100% 이상의 성장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려면 장기적인 마스터플랜보다는 손쉬운 해외제품 유통과 같은 단기적인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벤처투자자들이 기술가치보다는 당장 코스닥에 등록해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기술에만 투자합니다. 이런 투자환경에서 진정한 벤처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벤처기업들의 하소연도 적지 않다. 또 맞는 소리다. 그러나 벤처기업은 환경을 탓하기 전에 과연 아직도 벤처정신이 유효한지 자문해야 한다는 외부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