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부문에서 남북간 경제협력을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당국간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지난 11월 8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경제협력 실무접촉에서 타결되었다. 투자보장과 이중과세방지, 상사분쟁해결 그리고 청산결제 등 4개 분야에서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가서명된 것이다.
북쪽과의 경협을 계획하고 있는 기업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랜 숙원이 하나 풀린 셈이다. 기업들은 일단 남북경협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과 수익모델들을 생각하여 경협의 범위를 넓히고 내용을 풍부하게 해 나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여러 경제협력의 모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쪽의 정보기술(IT)인력과 기술력을 남한 IT기업들의 마케팅과 자본력에 결합시키는 문제다. 이는 또한 민족의 통일 및 땅덩어리의 통일과 함께 수반돼야 할 남북간 정보격차의 해소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다행스럽게도 북한은 경제난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지난 85년부터 과학기술 및 IT 관련 정책들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고급인력과 조선컴퓨터센터, 평양정보센터 등 관련 연구기관을 확보해 놓고 있다. 관련 대학의 숫자도 상당하여 매년 3000여명의 인력이 배출되고 있으며 이미 배출된 인력도 10여만명을 헤아린다고 하니 IT관련 산업을 남북이 합작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는 대단히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국자간의 합의나 기업차원만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즉 북쪽은 지난 79년 제정된 미국의 반테러법에 의해 87년부터 13년째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어 여러 국제적인 경제관련 제재를 받고 있다. 또한 코콤(COCOM)을 대신해서 96년 33개국 회원국으로 출발한 바세나르협약(Wassenaar Arrangement)에 의한 제재도 함께 받고 있다.
바세나르협약은 웬만한 생산기계나 라인에 필수적으로 설치되는 고급 제어장치 및 계측장치 등을 포함해서 컴퓨터와 관련부품 등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적인 전략물자 수출입통제 장치다. 바세나르회원국인 우리나라 역시 이를 반영하여 펜티엄급 이상의 컴퓨터 등 전략물자가 군사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보고, 이것들을 이중용도 전략물자로 지정하여 북한반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남한의 IT기업들이 답답해 하는 부분은 바로 이점이다. 바세나르협약에 의한 전략물자통제가 남북간 IT분야에서의 교류에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남한에서는 이미 용도폐기 상태가 된 486급 컴퓨터도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다고 판단, 민간단체에서 어린이교육용으로 기증하는 중고품조차 반출을 불허하는 실정이다. 본격적인 협력이 이뤄지려면 북미간에 현안들이 타결되어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고 컴퓨터와 같은 물자들에 대한 미국의 수출입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간의 협약은 필요에 따라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국가간 합의로 체결되는 것이다. 문제는 무조건적인 통제가 능사가 아니라 용도의 투명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 일 것이다. 바세나르협약 역시 해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융통성있게 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미국보다 더 보수적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 이 협약의 틈을 비집고 미국 기업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 북쪽과의 소프트웨어 개발작업이나 그들이 보유한 원천기술을 활용하려는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IT분야의 협력사업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바세나르협약에 대하여 좀더 전향적이고 통일지향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협력사업에 대한 적절한 세부 원칙을 세우고 이를 바세나르협약 회원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동의를 받는 외교적 노력도 함께 전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