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은 의류, 식품 등 생활용품과 달리 전통적으로 생산업체의 입김이 유통시장을 좌지우지한다. 그러나 최근 국내 시장에서 급속히 늘고 있는 외산 가전제품은 이같은 국내 가전 유통시장 구조에 큰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외국 가전업체들이 한국시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그동안 가전메이커에 의존해온 유통망이 이제는 가전3사 외에 대안을 찾게 되면서 가전 제조업체들의 우산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 하반기 들어 일본 업체들의 공세가 더욱 가열되면서 가전 생산업체와 유통업체간 힘의 역학관계에서 유통업체가 실질적인 우위를 점하게 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수입물량 증가를 배경으로 급격히 세를 확대해가고 있는 가전 유통시장의 변화를 3회에 걸쳐 점검한다. 편집자◆
지난해 국내 가전시장에는 수입선다변화제도 완전폐지, 오픈 프라이스 제도 시행, 주요 가전제품에 대한 특별소비세 폐지 등 업계 전략을 기초부터 수정해야 하는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가전업계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오픈 프라이스 제도의 도입. 가전업계는 이 제도의 시행으로 유통업체가 제조업체를 리드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오픈 프라이스 시행 취지는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업자가 판매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하고 이를 표시해 판매함으로써 유통구조를 제조업체 위주에서 유통업체 중심으로 전환, 이를 통해 소비자들의 선택폭을 넓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픈 프라이스 제도는 국내 가전유통시장의 전통적인 틀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당초 도입 취지가 잘 녹아들지 않았고 유통시장 주도권은 여전히 생산업체의 몫이었다.
이로 인해 지난해 가전산업 최대 이슈로 오픈 프라이스 제도보다 수입선다변화 제도 폐지를 꼽는 이들이 많다. 수입선다변화 제도 폐지로 국내 가전업계는 제조·유통분야 전반에 걸쳐 실질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가전유통업계는 일본 가전제품의 증가로 유통구조가 유통업체 중심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다변화 제도 폐지 1년여가 지나면서 일본 주요 가전업체들은 국내시장에 현지법인을 잇따라 설립하고 판매물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반면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일본 유통업체들의 국내진출은 소문만 무성할 뿐 가시화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까지 국내시장 판매를 강화하고 있는 일본 가전업체들로서는 대리점 망 구성, 양판점, 백화점 등의 주 판매채널 구축을 위해 국내 유통업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 업체간 경쟁도 가시화되면서 국내외 업체 가릴 것 없이 유통업계의 눈치를 살피는 양상까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국내 가전업체들에도 이어져 삼성전자, LG전자 등 주요 업체들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요 양판점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기존 대리점 체계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대형 유통점 중심으로 유통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해 대형 양판점과 할인점의 힘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유통점은 대형화 추세에 힘입어 구매력이 확대되는 반면 생산업체들은 유통업체를 잡기 위한 경쟁이 심화,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장분위기도 달라져 유통업체들은 더 이상 일본 업체 상품 취급으로 인한 이미지 손상에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화점들은 수입가전대리점의 입점을 독려하고 있으며 대형 할인점들은 고급 가전제품 전시공간을 마련하고 일본 제품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주요 가전업체들의 유통채널별 가격통제는 여전하다. 외국업체들도 브랜드력을 앞세워 국내시장에서 유통가격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통제력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일본시장에서 소니와 어깨를 견주고 있는 마쓰시타의 국내시장 직접진출과 JVC코리아, 아이와코리아 등의 영업강화가 내년 가전유통시장의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업체의 국내시장 영업이 본격화되면 유통업체로서는 취급할 수 있는 제품군이 늘어나 유통업체와 공급업체간 힘의 구도변화가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