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자 박종섭 사장 자구안 발표 의미·전망

박종섭 현대전자 사장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시작됐다.

박종섭 사장은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다양한 경로로 자금을 유치해 지난달부터 내년말까지 도래할 6조3500억원의 부채를 갚아나가겠다고 선언했으나 계획대로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자금 유치도 일정대로 되고 매출도 호조를 보이는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날 기자회견은 마치 토론장을 방불케 했다.

자구계획이 가능하냐는 질문이 쏟아졌으며 이에 대해 박종섭 사장은 영업현금흐름비율(EBITDA) 등 각종 수치를 제시하며 상세히 설명했다.

현대 우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는냐는 의구심도 잇따랐으나 박 사장은 『내년 상반기로 예정돼 있으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며 이미 지분 매각의 결정권이 우리 회사와 살로먼스미스 등에 넘어와 있다』라면서 독립경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여러차례 밝혔다.

◇ 자금조달 가능한가 =현대전자의 자금조달 계획 가운데 가장 비중인 큰 것은 국내외 회사채 발행과 원화 신디케이트론이다. 전체 조달금액의 67%에 이른다.

현대전자가 주력하는 것은 원화 신디케이트론이다. 국내외 금융기관의 신뢰를 얻으면 신용등급도 올라가 회사채 발행이나 장기 차입금 등 다른 자금조달 계획에도 청신호를 주기 때문이다.

현대는 모두 1조원 조달을 목표로 잡았는데 이미 5000억원을 확보했다는 게 현대전자의 주장이다. 박종섭 사장은 『나머지 5000억원 가운데 2000억원은 어느 정도 가능하며 나머지 3000억원은 쉬운 것은 아니나 노력에 따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전자는 적어도 목표치의 70∼80% 정도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신디케이트론보다 규모가 큰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자본시장이 가뜩이나 불안정한 상태에서 현대전자 사채에 대한 투자가 활발할지 미지수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해외 매출채권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전자는 수출 계약서를 갖고 국내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으려 하나 구조조정을 앞두고 자기자본비율(BIS) 맞추기에 급급한 금융기관들로선 아무리 우량 매출채권이라 해도 매입을 꺼릴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금융권의 동일계열 여신한도(25%) 규제가 현대전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은행의 경우 현대에 대해 8조5000억원의 여신을 갖고 있는데 올해안에 29%대, 2004년께 25% 밑으로 낮출 계획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디케이트론이니 대출이니 하는 현대전자에 대한 추가 융자에 나서기 힘들다.

박종섭 사장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계열 분리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강조했다.

11조3000억원으로 잡은 내년 매출 계획도 현재로선 실현이 불투명하다. 현대전자는 아직 원가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D램 가격의 하락세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현대전자의 D램 매출도 지난해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한 실정이다.

D램 사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현대전자로선 다른 부문에서 수익을 올려야 하나 통신이나 LCD 모두 매출 규모가 작은 데다 성장세도 주춤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종섭 사장이 기자회견을 가진 이날 그동안 곤두박질했던 D램 가격이 급상승했으나 반등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론적으로 현대전자는 내년에도 올해와 같이 빠듯한 경영을 펼쳐야할 입장이다. 가처분 현금과 외부 조달 자금을 합하면 6조9000억원으로 같은기간 부채 6조3500억원을 갚고도 남을 수 있다. 그렇지만 차이가 5500억원에 불과해 자구계획이나 매출계획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삐딱해도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이는 현대전자가 앞으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시도할 수 밖에 없음을 예고하고 있다.

자금조달 가능성에 대해 박종섭 사장은 『취임한 첫날부터 금융기관을 찾아다녀 부채를 해결해 왔으며 내년에도 이같은 정공법으로 충분히 부채를 갚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 독립 경영의 앞날 =미지수인 자구계획과는 별도로 현대전자의 독립 경영은 앞으로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박종섭 사장은 『지분 정리가 이뤄지는 즉시 계열 분리를 완료할 것이며 이를 통해 현대전자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하는 선진국형 「주주경영회사」로 변모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전자는 이르면 이번주중 정책 당국에 계열 분리 신청 절차를 밟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지분을 인수할 세력이 어느 정도 가시권 안에 들어왔음을 뜻한다.

현재로선 지분투자만을 염두에 둔 국내외 금융권이 될 가능성이 높으나 현대전자의 해외 거래선이나 경쟁관계인 반도체업체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박종섭 사장은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으나 『누구라도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으나 경영권만은 특정 주주가 지배하는 구조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분 매각에도 불구하고 현대와의 끈을 유지할 가능성에 대해 박 사장은 『정 전회장이 경영권과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으며 이미 지분 매각도 일임한 상태여서 실질적으로는 이미 계열 분리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 사장은 나아가 『(이러한 의구심이 남아 있다면)지금 당장이라도 회사 이름을 바꿀 수 있으며 나를 비롯한 이사의 재신임 절차를 밟을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

누구도 섣불리 도와주지 않는 곳에 내동댕이쳐진 박종섭 사장과 현대전자가 외롭고 지리한 싸움을 어떻게 극복할는지 국내외 산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