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한글과컴퓨터를 위한 변명

서현진 논설위원 jsuh@etnews.co.kr

98년 6월 IMF 여파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과 이를 개발했던 한글과컴퓨터, 그리고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이민화씨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민화씨는 「아래아한글지키기운동본부」라는 거창한 간판을 내걸고, 『외국기업에 판권이 넘어가는 「아래아한글」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도 직전의 한글과컴퓨터를 살려내야 한다』며 여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민화씨는 이때 「아래아한글」의 수난을 「민족의 수난」과 동일시하던 성난 군중과 함께 한글과컴퓨터 사장이던 이찬진씨에게 경영권 포기를 요구하고 나선다. 6개월여 임금체불 상황이던 한글과컴퓨터가 사는 방법은 딱 한가지, 마이크로소프트(MS)에 「아래아한글」 판권을 넘기는 대신 2000만달러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에 앞서 이찬진씨는 삼성 등 국내 대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아래아한글」을 맡아줄 것을 호소했으나 모두 거절당한다. 「아래아한글」의 상품성이 다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찬진씨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MS였다. 이찬진씨는 「아래아한글」 사용자들을 보호하고 그 기능적 장점들을 「MS워드」에 수용하겠다는 조건으로 MS 제의를 수용한다. 한글과컴퓨터는 인터넷 기업으로서 새로운 벤처에 도전하게 할 참이었다. 바로 이때 이민화씨가 등장했다. 벤처기업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이민화씨는 연일 군중에게 외쳤다.

『우리 국민들이 다시 「MS워드」를 배울 경우 「아래아한글」 사용자의 재교육 비용에 3000억원, 공공기관의 한글문서 교체비용으로 1000억원, 「MS워드」 구매비용으로 1000억원 등 적어도 5000억원 이상의 국가적 손실이 발생하지만 「아래아한글」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비용은 50억원이면 충분합니다.』

이런 주장이 위력을 발휘했는지, 한달 만에 이민화씨는 이찬진씨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아래아한글지키기운동본부」가 모금한 이른바 국민주 20억원과 이민화씨가 경영하는 메디슨 명의의 50억원 등 70억원의 출자를 받아들이되, MS와의 투자유치협상은 중단하며 이찬진씨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이었다.

항복문서를 받아낼 당시 한글과컴퓨터 주가는 4800원대, 이로부터 1년 후 주가는 무려 120배나 뛰어 오른다. 물론 제1대 주주는 메디슨으로 바뀐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주식시장에 발표되는 소재가 「아래아한글」과는 무관한 인터넷 비즈니스에 관한 것들이고 후속 버전을 잇지 못한 「아래아한글」의 시장점유율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한글과컴퓨터가 주식시장에서 인터넷기업으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아래아한글워디안」이라는 후속 버전이 출시된 것은 「아래아한글지키기운동본부」가 약속한 날짜로부터 2년이 훨씬 지난 올 10월께다. 하지만 이 버전은 성능은 차치하더라도 시장주도권을 이미 MS에 내준 뒤 출시된 뒷북거리라는 평가를 받고 만다. 한해 판매량이 100만개를 넘었고 판매 첫 한달 동안에만 20만∼30만개에 이르던 「아래아한글」이었지만 「아래아한글워디안」의 첫 한달 판매량은 고작 6만여개에 그쳤다.

바로 이때 이민화씨는 메디슨 소유의 한글과컴퓨터 지분을 싱가포르 기업에 매각한다. 그 결과 한글과컴퓨터의 지분구조는 홍콩계와 싱가포르계가 각각 1, 2대 주주가 되고 메디슨은 그 뒷자리로 내려앉았다. 한글과컴퓨터의 경영권이 사실상 외국계에 넘어가는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아래아한글」과 관련된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MS처럼 「MS워드」에 기능 일부를 수용해 주고 사용자를 보호해 주겠다는 「아래아한글」에 대한 조건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시장점유율 수위도 무너졌고 한글과컴퓨터는 인터넷기업이 됐다. 다만 메디슨이 약 10배의 지분매각 차익을 올렸을 뿐이다.(여기에 대해 메디슨의 주주들은 100배 이상 주가가 올랐을 때 매각하지 못한 이민화씨의 경영능력을 질타했다고 한다)

이 사건 직후 MS측 관계자에게 조건이 맞는다면 지금이라도 「아래아한글」 판권을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시장성이 있다면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