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 논설실장 hdlee@etnews.co.kr
흔히 「세월 참 빠르다」고 말한다. 외동자식처럼 덩그러니 한장 남은 달력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올해는 더욱 그런 느낌을 갖는다. 「총체적 난국이다」 「어렵기는 해도 위기는 아니다」로 1년내내 정치권에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신물나게 보고 있는 사이 세월은 벌써 세밑에 와 있다. 제2의 경제위기설이 나돌고 정치·경제·사회 등 어느 곳 하나 매끄럽게 굴러 가지 않아 세월 가는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면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경제난에 시달리다보니 다른 데 곁눈 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가는 세월은 뒤꿈치를 들고가는지 발짝 소리조차 내지 않건만 그래도 세월은 달음질해 올해라고 해야 겨우 보름 남짓 남았다. 한해의 끝과 시작의 고리인 올 12월은 그 표정이 예년보다 유난히 스산하고 어두운 모습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난제들이 안개처럼 깔려 있으니 국민의 표정이 밝을 리 없다.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송년의 기분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IT업계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15일은 IT업계의 최대 이권사업이라는 IMT2000사업자를 발표하고 19일에는 위성방송사업자를 결정할 예정이니 그럴만도 하다. 사업권을 신청한 업체들의 입장에서 보면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과 같다. 탈락한 업체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해보다 총체적으로 어둡고 불안한 것만은 틀림없다. 어느 것 하나 꼭 집어 문제가 없다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정치·경제·사회 등에서 IMF 초기와 비교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고 국민은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연초만 해도 우리는 얼마나 장밋빛 꿈과 희망에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는가. 오색 폭죽을 밤하늘에 터뜨리며 새 천년의 첫해를 맞이하며 밝은 희망의 미래를 갈구하지 않았던가. 연초의 경기회복 낭보를 시작으로 벤처열풍, 6·15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 남북교류 등의 소식은 국민의 가슴에 진한 감동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희망의 전령은 간 곳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그토록 자랑스럽던 일들이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불신과 불만,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언행불일치로 인한 외화내빈의 정치와 경제침체, 사회갈등, 도덕적 해이, 제몫 찾기와 집단이기주의 만연 등 숱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책은 비틀거리고 문제 발생시 내놓은 대책은 본질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원인은 모두 자기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사를 불문하고 일을 추진할 때 원칙을 존중하고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했는가」 「사리가 아닌 공익을 저버린 적은 없는가」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가」 등 이런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런 점에서 12월은 회고와 자기반성을 해야 하는 달이다. 그 속에서 새해를 설계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기업들도 이미 올해 사업결산에 착수했다. 연초 세웠던 각종 사업을 내용별로 분석해 실적을 집계한다. 이를 바탕으로 논공행상을 한다. 그래야 심기일전할 수 있다.
엊그제 수도권의 민생 현장을 찾은 집권당의 지도부에게 국민은 한결같이 『IMF 때보다 더 살기 어렵다』 『정치와 경제적으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정치권은 왜 권력다툼만 벌이고 있나』 『시중에는 굶은 사람이 많다』는 등의 거칠고 성난 말을 했다고 한다. 지도층과 국민간에 얼마나 인식의 차이가 심한지를 알 수 있다. 공적자금 109조원을 투입하고 그것이 모자라 추가로 40조원을 조성해도 경제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날의 일에 대한 각자의 회고와 반성 없이는 지금의 총체적 난관을 극복하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현실진단 없이 어떻게 올바른 대책이 나오길 바라겠는가. 창조적 변화의 주체는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이다. 위기는 위기라는 현실인식을 할 때 극복할 수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다. 정부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수요자 중심의 정책을 개발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런 것은 자성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것은 우리한테 달려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