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논설위원 parkjs etnews.co.kr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고나면 하루에도 수천명의 억만장자가 생겨나는 곳. 지난 10년 동안 정보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호황을 구가하면서도 인플레이션조차 찾아보기 어려워 「신경제」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설명해야 했던 진원지. 바로 그곳 실리콘밸리의 최근 뉴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메르체데스벤츠와 BMW 등 고급 승용차가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화제였다. 매년 이맘때면 한 대에 1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승용차를 한 회사에서 수십대씩 구입해 성과급으로 직원들에게 지급하던 것이 관례처럼 돼 왔으나 이제 그것은 마치 옛날 얘기가 돼버린 듯하다. 닷컴기업의 거품 제거 영향으로 나스닥이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고 수많은 기업이 우울하게 연말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같은 모습은 한국의 사정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올 한해의 화두는 디지털과 벤처였다. 디지털 기술은 2000년 벽두부터 우리 기업에 새로운 환경, 희망에 가까운 그 무엇으로 다가왔다. 많은 기회를 창출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벤처기업이 탄생했다. 특히 벤처는 국난과도 같았던 외환위기(IMF)와 재벌 위주의 산업구조가 갖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는 듯했다. 연초까지 코스닥의 상승으로 우리도 신흥 거부기업가가 백출한 것이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국내 자동차가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큰 뉴스가 되지 않는다. 코스닥의 폭락으로 이미 그 정도는 화제가 되지도 않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 같다.
얼마 전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기업인 휴렛패커드(HP)는 직원들에게 출장을 자제하라는 방침을 밝혀 예정돼 있는 출장이 취소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보다는 좀 최근의 일이지만 마이크로소프트도 그같은 회사 방침을 밝혔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내년도는 예년의 5∼6% 경제성장에 크게 못 미치는 2% 내외의 저조한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는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도 그맘때다. 미국은 아직까지도 다소 논란은 있지만 그래도 경기 연착륙에 대한 기대가 높다.
거의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자동차가 팔리느냐, 안 팔리느냐가 아니라 회사가 도산이냐, 아니냐를 다투고 있었고 직원들의 출장 자제보다는 길거리로 내몰리느냐, 아니냐가 문제였다. 또 경기 연착륙의 기대는 이미 난망스런운 일이고 스테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기업체들의 공통된 관심은 침체된 경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인 것 같다. 우리의 기업들은 아직도 수익 모델과 수익성에 매달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적지않은 벤처기업이 미래가치를 담보로 투자를 유치하다가 이제 투자의 손길이 끊기자 생존을 위해 수익을 내야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까 현상 유지라도 해야겠다는 형국이다. 수익 모델은 기업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의 어려움은 기업가가 순서를 지키지 않은 데 대한 징벌과도 같다.
미국의 기업체, 특히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기업들도 대부분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황에 대해 불안감은 지니고 있지만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우선 그들이 이번 사태에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하나요, 또 하나는 발상을 전환해 새로운 사업에 착안하는 것이다.
먼저 비용을 줄이는 것은 기업체에 있어서 가장 쉬운 길인지도 모르겠다. 회사가 수입이 크게 늘어나지 않더라도 지출을 줄이면 수익성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계산이다. 이제까지도 발견하지 못한 수익 모델을 발견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버틸 수는 있다는 판단이다. 일부 사업부서를 줄이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원들을 줄이는 극단적인 방법은 아직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다.
두번째의 방법이 특별한 것으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에는 IT가 종전에 하나의 붐을 조성했듯이 이젠 바이오산업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다. IT의 불황을 BT(biotechnology)로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들이 바이오산업에 진출하고 그 기업체에 투자자의 지원이 잇따르고 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는 이제 IT에서 BT로 바뀌고 있다는 말까지 나돈다. 그 꼬리에는 바이오산업은 향후 5∼10년 동안 호황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얼마 전까지 IT산업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