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벤더 파이낸싱 왜 축소하나

지난해까지만 해도 너도 나도 벤더파이낸싱을 추진해온 다국적 통신장비업체들이 올해 들어 이를 재검토하는 것은 세계 최대 통신 시장인 미국 통신 환경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최근 미국 내 신생 통신사업자나 인터넷서비스업체들은 경쟁가열, 수익성 악화 등에 직면해 파산을 앞두고 있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등 통신 재편의 한가운데 서 있다. 이에 따라 벤더파이낸싱 형태로 이들 업체에 통신장비를 공급해온 루슨트·시스코 등은 부실채권 증가로 주식이 하락하는 등 통신사업자 부실이 그대로 통신장비업체에 전가되는 동반부실현상을 겪고 있다.

루슨트테크놀로지스는 지난해 신생 서비스업체들에 대한 부실 대출이 분기 매출에 타격을 입혔다고 발표, 주식 폭락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여파로 대다수 다국적 통신장비업체들은 본사 내부에서 벤더파이낸싱에 대해 지난해 말 전면 재검토에 착수했으며 이에 대한 영향이 국내에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기업의 한 임원은 『벤더파이낸싱을 진행하기 위해 본사 임원과 함께 국내 통신사업자나 대상 기업의 재무 상태를 점검한 결과 본사 임원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며 『특히 수익모델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더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벤더파이낸싱이 줄어들면

우선 올해 예정됐던 국내 인터넷사업자나 통신사업자의 투자가 계획대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통신·SK텔레콤 등을 제외하고 대다수 통신사업자들은 자금 상황이 악화된 점을 감안, 벤더파이낸싱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다국적기업들의 이런 방침에 따라 크게 한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지난해 루슨트와 1억2000만달러, 시스코와 1억7000만달러 등 총 5억달러 규모의 벤더파이낸싱을 이끌어낸 하나로통신과 시스코로부터 1억2000만달러 상당의 벤더파이낸싱 계약을 체결한 두루넷은 올해 투자분의 상당부분을 벤더파이낸싱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장비업체에게는 공정한 경쟁 기반이 형성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기대된다. 국내 장비업체 한 관계자는 『지난해 장비 공급에 우선 순위는 성능이나 가격보다 벤더파이낸싱이 좌우했던 예도 적지 않았다』며 『벤더파이낸싱이 축소된다면 국내 장비업체들에게 그만큼 제품 판매 여지가 넓어지는 셈』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국내 장비업체들이 판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장비는 상당부분 이미 벤더파이낸싱 계약이 체결돼 있어 효과가 당장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또 벤더파이낸싱이 축소될 경우 가격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그만큼 제품 마진폭은 줄어들게 돼 해외 장비를 국내에 공급해온 네트워크통합(NI)업체들은 수익성 악화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불씨는 남아있다

대다수 다국적기업들이 벤더파이낸싱을 축소하기로 한 것과는 반대로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는 올해도 벤더파이낸싱을 적극 활용, 시장점유율을 제고한다는 방침이다. 이 회사는 벤더파이낸싱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본사 소속의 시스코캐피털을 국내에 유치했다. 시스코의 한 관계자는 『시스코가 한국 내 벤더파이낸싱에 대한 금액 한도를 설정하지 않았다』며 『좋은 협력관계가 성립된다면 벤더파이낸싱을 안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시스코가 올해도 공격적인 벤더파이낸싱 정책을 유지한다면 다른 다국적 통신장비업체들도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은 상존해 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