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월드와이드넷 전무 chanc@hananet.net
최근 며칠간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국내 방송 현실을 고찰해 볼까 한다.
얼마전 방송심의위원회에서 현재 몸담아 일하는 코미디TV 프로그램이 심의위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생방송이기 때문에 엉뚱하게 튀는 언행이 많고 한밤중 성인대상 프로그램이라서 성을 도구화한 게임과 벌칙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무료 지상파가 아닌 유료 케이블 TV에서 어른들이 한밤중에 편하게 웃다가 잠들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지상파의 요즘 코미디가 모두 10대 차지인 만큼 30대 이상도 어깨 힘빼고 볼 수 있는 방송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터넷에 별 소리 별 모습이 다 보이는 현실을 고려할 때 케이블TV 심의기준도 다시 마련돼야 한다.
한 심의위원의 충고가 아직까지 가슴을 친다. 『오랫동안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줄 안다. 방송 후배니까 아끼는 입장에서 묻는 데 이런 저속한 방송으로 시청률을 올리겠다는 얄팍한 경영자가 됐는가.』 방을 나와 방송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얼마후에 경실련에서 연락이 왔다. 경실련이 주관하는 『올해 시청자가 뽑은 좋은 프로그램』 시상식 진행과정을 협의하기 위해서다. 지난해엔 방송사마다 다큐·오락·드라마 등 기획성이 뛰어난 작품이 많아서 뽑기보다 떨어뜨리기가 힘들었다. 경실련 시상식은 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단체의 성격상 제작진이나 방송사의 명예로 여겨진다. 지난해가 6년째였는데 나는 초반부터 심사에 참여해 왔다. 여러 좋은 분들이 함께 심사위원 역할을 해 왔지만 조직상 실속이 적어서인지 면면이 자주 바뀌었다. 그런데 전화로 심사위원장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런 저런 일 겪으면서 PD노릇을 그만큼 해왔으면 그 역할을 맡아도 되지 않느냐며 나를 곤란하게 했다. 자격이 모자란다고 하니 내가 PD로서 제작해온 프로그램들을 거론했다.
나는 방송위원회에서 야단맞던 일을 생각했다. 방송의 공익성과 건전한 문화창달을 위해 코미디TV의 책임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을 겹쳐 떠올리면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 다음날에는 한 케이블TV방송국(SO)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우리 SO망이 부족하지만 코미디TV를 보고 싶다는 시청자들이 많아서 송출은 하겠지만 단 조건이 있습니다. 신규 프로그램공급업자(PP)들이 서로 내달라고 하니 수신료를 안받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신규 PP들이 정부허가를 받아 놓고서도 SO의 송출망이 부족하다는 희극적인 사유로 PP에서 제작해서 보내는 방송이 각 가정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전화를 받고 갖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5년간 예술영화TV를 운영하면서 얼마나 손해를 봤던가. 한국에서 유일한 예술채널을 운영하면서도 시청자 선호도가 높은 코미디채널을 따내어 손실을 보존 받으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등등이 그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채널 승인을 얻어내고 방송발전기금 5억원을 내고 매달 분배망 사용료로 5000만원씩 내고 인원을 충원해 제작비를 더 들이는데도 현재 수신료 수입은 0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수신료 없이 보내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오히려 SO들에 기자재 비용을 보조해 주면서 송출해달라고 부탁하는 PP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짧은 기간 동안 이같은 일들을 겪으면서 뉴미디어 정책의 기조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