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부처이기주의

지난 1월 중순경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눈길을 끄는 한 모임이 있었다. 산업자원부의 이석영 기획관리실장을 비롯해 정보통신부의 김창곤 기획관리실장, 과학기술부의 이헌규 과학기술정책실장 등 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정보기술(IT) 관련 행정부처의 기획 조정업무의 책임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날 회의내용은 관련업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날 모임이 끝난 후 이들은 부처이기주의를 타파하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고 회의내용을 밝혔다. 각 부처가 IT, 바이오기술(BT) 등 신산업 분야의 업무 관할권을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서는 기업들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벌여온 양측의 갈등에 비춰 보면 때 늦은감이 있지만 IT분야의 관할권 다툼을 지양하고 양질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이들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정통부와 산자부의 힘겨루기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들 양측의 정책적 갈등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동안 양측이 업무를 서로 월권하거나 상대측의 기꺾기에 행정력을 낭비해 온 사례는 상당히 많다.

실례를 보자. 산자부가 범국가차원에서 전자상거래(EC)업무를 관장하기로 했으나 정통부와 손발이 맞지 않고 관련 기술표준과 관련해서도 산자부는 산자부대로 정통부는 정통부대로 별도의 조직을 구성해 기술개발과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건교부의 지리정보시스템(GIS), 기상청의 기상관측, 환경부의 환경관측 및 원격탐사 관련 자료에 활용할 비행선개발과 관련해서도 양측의 의견은 다르고 인터넷시대에 편승해 성장이 예상되는 디지털가전산업에 대해서도 한치 양보없는 주도권잡기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사례로 음성정보기술 문제를 들 수 있다. 산자부는 음성정보기술을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지난해 8월 한 대학교에 기초자료조사를 의뢰했다. 얼마전에는 그 자료를 기초로 관련기업을 모아 협회설립을 추진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실무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정통부는 지난 1월말경에 또 다른 음성인식산업육성 계획을 발표하고 정보통신진흥협회에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산업발전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정통부는 지난달 서울에서 한국, 일본, 호주 3국의 관계자들을 초청해 기업간(B2B) 전자상거래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국제간 전자상거래 활성화포럼 회의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국제간 B2B의 활성화를 추진하겠다는 정통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산자부는 완전 배제됐다.

객관적인 면에서 보면 그동안 정통부의 산하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오랫동안 음성정보기술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산자부가 굳이 정통부와 의견 교환없이 음성정보기술을 산업으로 육성한다고 나선 것도 그렇고 정통부가 범정부차원의 국가 전자상거래 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하는 산자부를 제외하고 국제회의를 실시한 것도 옳지 못하다.

급격히 변하는 국제환경에 맞춰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두 기관이 「명분없는 경쟁」에 매달려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이기심을 자제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이익 추구는 경제 사회적 활력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정당하게 「내 몫」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야 누구도 이를 비난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비춰 보면 요즘 이들 양측의 갈등은 「정책적 견해차이」라기보다 대부분 업무영역을 놓고 벌어지는 「감정싸움」인 것 같아 씁쓸하다. 만약 그렇다면 해결방법이 없다. 특히 자존심 대결에 바탕을 둔 경쟁이라면 싸움은 원초적으로 쉽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적으로 다툼만 해서 되겠는가. 행정의 효율성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적인 흐름을 고려하면 하루빨리 개선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다. 일본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얼마전 일본의 통산성과 우정성이 IT전략회의 사무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힘겨루기 끝에 정작 IT전략회의 사무국은 우리나라 총리행정조정실에 해당하는 내정심의실로 넘어갔다. 그래서 통산성 전자정책과장은 부처 이기주의에 반발해 벤처회사를 차린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통산성과 우정성은 얼마후 민간기업의 IT·생명공학기술을 지원하기 위한 「기반기술연구촉진센터」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동안의 경쟁은 접어두고 기업을 위해 통산성과 우정성이 힘을 합친 것이다.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큰 틀에서는 협조원칙을 깨지 않는 일본 정부의 지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정통부와 산자부의 부처이기주의가 기형적인 정부조직에 의해 업무구분이 모호해서 생기는 것인지, 구성원들의 잘못된 자존심대결에서 연유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속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