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전략의 변곡점

박재성 논설위원(jspark@etnews.co.kr)

1월의 마지막 날에 취해진 미국의 연방기금 금리인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이 예상되는 경기침체 앞에서 무릎을 완전히 꿇은 조치였기 때문이다. 세계 금융의 황제라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라 해도 미끄러져 내리는 미국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FRB는 성명서를 통해 『에너지 가격 상승은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약화시키고 기업의 수익성에도 압박을 가해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다』고 딱한 처지를 말했다.

미국의 연방기금 금리는 한때 19%를 웃돈 적이 있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 볼커 FRB 의장은 미국의 과열된 경기를 식히기 위해 그같은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미국은 심각한 경기침체와 수백만명의 실업자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통화정책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지난 1월 3일에 이어 31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0.5%포인트를 인하함으로써 금리는 5.5%로 낮아졌다. 이번 조치는 8년 만의 최대 폭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강력했다. 언제나 신중함을 잃지 않는 FRB도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서 개최한 이틀 동안의 비공개회의도 긴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쯤 세계 각국의 기업가와 정치지도자 수천명도 한자리에 모여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있었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경제 및 기업 회생」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경기의 하강국면이 뚜렷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열린 이번 포럼에서 그들은 「과연 21세기 경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21세기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기업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쏟아지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전세계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의 처방을 기대했고 언론도 호응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며 말의 성찬을 벌이고 있을 때 말보다 실천이 앞선 것은 에릭슨의 휴대폰 자체생산 포기 발표였다. 비록 지난해 26억달러의 적자를 냈다고는 하나 노키아·모토로라에 이어 세계 3위의 휴대폰 업체로서 자체 생산을 포기한 것은 분명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

에릭슨은 『3세대 고부가가치 제품에 주력하고 이동통신 토털솔루션 업체로 거듭날 것』이라며 생산포기 배경을 밝혔다.

에릭슨의 이번 단말기 생산 포기는 바둑의 멋진 사석작전과 같은 결과로 이어질지 현재로선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백악관이 경기 침체를 확인해 주자마자 이루어진 단호하고 신속한 경영적 판단은 마치 세계 최대의 반도체 업체인 인텔이 조기에 메모리사업을 포기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치중함으로써 대성했던 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래서 에릭슨의 경영층에선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인 카산드라의 힘이 느껴지는 듯하다.

에릭슨의 조치는 「경기의 변곡점에서 단행한 전략의 변곡점」이라면 적절한 표현일까. 겉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실상 적극적인 조치였다. 정작 그러한 조치가 필요한 것은 한계 상황에 처한 우리의 많은 기업일 것이다. 일부이겠지만 우리의 휴대폰 생산업체들이 에릭슨의 휴대폰 생산철수로 인해 반사이익이나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핵심에서 한참 벗어난 것 같다. 우리의 기업은 지난 2∼3년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취약한 경쟁력과 씨름을 해왔지만 오히려 덩치만 키우고 있다. 무엇 하나라도 거덜나기 전에는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게 우리의 기업풍토다.

물론 우리의 기업은 그룹 중심의 구조이다 보니 대추나무에 연줄 걸리듯 이해관계가 복잡해 경영자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작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기업환경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에릭슨이나 인텔의 경영자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기업을 살려내는 것은 경영자의 소명이다. 에릭슨은 우리에게 경영자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우쳐 주었다. 남보다 한발 앞선 통찰력, 정확한 판단, 그리고 추진력은 세계 일류 기업의 경영자에게서 종종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들과 같은 능력있는 경영자를 배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