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업체들이 경기악화와 매출부진으로 감산 및 감원 등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가운데 그 파장이 국내로 번지고 있다.
외국 반도체회사의 한국 마케팅법인들은 본사의 감원 여파가 미칠까 걱정한다. 국내 생산법인들은 설비확충 등에 필요한 자금을 본사로부터 들여오지 못해 사업 추진에 차질이 예상된다.
특히 IMF때 외자유치를 위해 해외에 매각된 생산법인들은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본사로부터의 지속적인 투자가 절실한 입장이다. 그런데도 정책 당국과 금융기관들은 이들 다국적 반도체회사의 국내 생산법인을 토종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하다시피 해 애초 해외에 매각한 목적까지 빛을 잃고 있다.
◇투자 유보 현황 =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는 지난해 본사로부터 조달한 8000만달러로 신규 생산설비(FAB)를 지난 연말 준공, 가동했으며 올해에는 2억달러 상당의 추가 투자를 유치해 보조 생산라인을 확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페어차일드 본사가 최근 경기 악화로 투자를 축소하면서 추가 투자를 당분간 유보하자는 의사를 한국법인에 전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페어차일드코리아는 추가 증설 계획을 전면 보류하고 생산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아남반도체의 후공정 패키징 공장을 인수한 앰코코리아는 올해 본사로부터 자금을 들여와 생산설비를 업그레이드할 계획이었다. 또 아남반도체 역시 앰코의 현지 인맥을 통해 외자를 유치해 수탁생산(파운드리)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설비 증설과 연구개발(R&D) 인력을 확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스닥 주가 폭락 등 미국 증시 상황으로 인해 앰코사의 투자 여력이 없어지자 두 회사 모두 이같은 핑크빛(?) 계획을 접었다. 그 대신 원가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집중해 버텨나갈 계획이다.
◇국내에 미치는 파장 =국내에 생산기지를 둔 한국법인들이 시설확충·연구개발 등에 필요한 자금을 본사로부터 지속적으로 지원받지 못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넘어온다.
이들 업체가 보유한 생산설비와 인력은 국내 토종기업 못지 않다. 전력용 반도체와 후공정 패키징 분야는 사실상 전세계 생산량의 30% 가량을 이들 업체가 점유한다. 나름대로 국내 반도체산업의 큰 축인 셈이다.
그렇지만 초기 단계에서 설비와 연구개발 투자가 중단되면 수출 확대는 물론 고용창출에서 우리는 손해를 보게 된다.
이들 다국적 기업의 국내 법인이 위축될 경우 알짜배기 사업을 해외에 넘겨 못쓰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동남아 후발 업체들에 추월당할 빌미도 제공한다. 실제로 중국·대만·말레이시아 등지의 업체들은 후공정 패키지 및 테스트는 물론, 완제품까지 생산할 수 있는 첨단 공장을 현지 정부의 지원 아래 설립하고 외국 반도체업체의 투자를 활발히 유치하고 있다.
◇대안 및 전망 =업계에선 이들 다국적 기업의 한국 생산법인을 과감하게 끌어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외국 회사라 해도 국내에 생산기반을 두고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수출실적과 1만명이 넘는 고용창출 효과를 내는 만큼 한국기업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는 국내 공장을 인수한 이후 90% 넘게 고용을 승계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에도 6억5000달러에 달하는 매출 실적을 거둬 지역사회에 환원했다. 칩팩코리아는 지난해 생산량의 80% 이상을 수출했고 올해도 200명 가량의 인력을 충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투자가 중단될 경우 국내 산업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의 효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 외국 반도체회사의 국내 생산법인장은 『정부가 외자 유치를 조건으로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약속했으나 실천되지 않고 있다』며 『본사도 한국에 추가 투자하기보다 투자 여건이 좋은 동남아 국가에 신규 투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당장은 본사의 투자 위축으로 한국에 대한 투자가 중단됐으나 투자 분위기가 되살아 나도 재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 다국적 반도체회사 관계자들은 『특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국기업에 준하는 세제혜택이나 자금대출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들 회사도 사업 성과를 인정받아 본사로부터 지속적인 투자를 이끌어내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게 순서이나 정책과 금융 지원에서 소외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 대한 투자가 적절했으며 투자 여건도 좋다」는 것을 보여줄 때 본사로부터 투자 유치는 더욱 용이해진다는 게 국내 법인장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