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우 세보아 사장 (hwchung@sevoi.net)
성경의 복음서 가운데 요즘 자주 되새기는 대목이 있다.
예수께서 각지를 순례하며 구세주 또는 선지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 고향 나사렛에 들러 설교를 하게 되나 그 곳 사람들의 반응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냉랭했다고 한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며 비아냥거리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성경은 전한다. 상심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과거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는 그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고향에서 냉대받은 예수는 결국은 같은 민족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현재 우리 국산 IT제품, 특히 네트워크 장비가 이 땅에서 겪고 있는 현실을 고향에서 냉대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모습에 비유한다면 논리적 비약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으로 가격과 성능에서 외산을 앞서는 제품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오히려 그 가치가 폄하되고 평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례를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지켜보았고 또 겪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가까운 곳에서 구체적인 예를 찾아 보자. 공공성이 특히 강조되는 대표적인 기업인 우리 기간통신사업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요 통신장비는 어떤 업체들이 공급한 것일까.
정보통신부가 작년 말 5대 기간통신사업자를 상대로 조사한 장비 보유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송장비는 미국의 루슨트테크놀로지스, 교환장비는 미국의 시스코시스템스가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을 포함한 국내 통신장비 제조업체들은 중소형 라우터·스위치·ATM교환기 등을 통해 점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국가기간망 곳곳에서 버티고 앉아 위용을 뽐내는 외산 장비들과 비교하면 그 형색은 실로 초라할 뿐이다.
이처럼 벤처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 장비들조차 냉대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당연히 우리의 기술력이 아직은 외산 제품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안에 따라 타당한 지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시장에서 국산 장비의 위치를 논할 때 이 논리로 국산 장비가 기피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기술·가격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초고속 인터넷장비조차 기간통신사업자에게 납품하려면 외산 제품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조건을 제시해야만 하는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기술과 가격요소를 떠나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우리네 의식 가운데 깊이 박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벤처기업이 첨단기술 개발·축적에 몰두해야 하는 본연의 자세를 저버리고 머니게임과 같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경쟁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특수한 일부의 행태를 일반화해 근본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다.
국산 IT제품이 국내 시장에서 부당하게 냉대받는 현실을 겪거나 이를 지켜볼 때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벤처기업인은 공공기관·대기업의 구매결정선상에 있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제품 선택시 편견 없이 국산 제품의 성능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과 마인드가 정립되어 있는가. 혹시 책임회피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가격 불문하고 유명 외산 제품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국산 장비를 냉대할 때 첨단 핵심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들은 국내 시장성에 회의를 갖고 광통신, 기가비트 백본장비와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노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글로벌마켓 시대에 국수적인 민족의식에 호소해 국산 제품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다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객관적 평가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산이라는 이유만으로 제품을 구매대상에서 배제하는 행태가 존재한다면 이 또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을 것이다. 비즈니스에 있어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시대에 국산품 기피라는 더 큰 장벽이 존재하는 현상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컬한 현실인 것이다.
성능만 입증되면 기회가 주어지는 해외시장 진출이 오히려 쉽다는 푸념섞인 주변의 조언들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된다. 부단한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다짐과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주변의 인식변화를 바랄 뿐이다. 후일 우리의 역사에서 21세기 초 이 땅에서 태동된 IT제품들이 고향에서 냉대받아 사라진 비운의 선지자 모습으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품 공급자·구매자 모두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보다 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