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천리길도 한걸음

 <데스크라인>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부터. 원철린 산업전자부장 crwon@etnews.co.kr

 

 반도체 이후 우리 경제를 책임질 미래 산업이 없다고 야단법석이다. 우리 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맡고 있는 반도체 경기가 죽을 쑤고 우리 경제도 여전히 맥을 못추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실제로 환율이 1300원대에 이르고 있으나 수출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지난 3월과 4월에 전년동기대비 마이너스 1.8%와 9.9%를 기록한 수출증가율이 이달 들어서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수출상품의 교역조건도 나빠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 자료를 보면 지난 1·4분기 순상품교역조건지수는 지난 95년 이후 최저수준인 지난해 4·4분기에 비해 불과 0.1포인트 오르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와 정보통신기기가 지난해 1·4분기에 비해 각각 49.3%와 25.6%나 떨어졌기 때문이다.

 IMF를 거치면서 한때 우리 경제가 살아난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다. 산업의 기초가 되는 국내 부품·소재산업의 기술경쟁력은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의 70%에 불과하다. 선진국을 100으로 했을 때 설계기술은 67.7, 신제품 개발기술은 66.4, 신기술 응용능력은 68.5로 대부분의 영역에서 크게 낮은 수준이다.

 IMF이후 경기회복은 구조조정에 따른 혜택이었을 뿐 정작 우리 산업구조의 경쟁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그렇다 보니 수출이 줄고 경제성장률도 떨어지고 있으나 별다른 돌파구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물론 21세기를 짊어지고 갈 미래 산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에서 허둥대느라 현실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디지털경제를 짊어지고 갈 미래 산업들은 이미 태동하고 있다.

 ‘닷컴거품론’이다 해서 폄하하고 있는 인터넷 관련 산업만 해도 그렇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인터넷산업들은 한단계 진보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인구만 해도 1000만명이 넘어섰고 인프라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반은 한층 더 진보된 기술과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되면서 인터넷산업은 우리의 디지털경제를 이끌어갈 주력산업이 될 것이다.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불투명하게 보이지만 IT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특히 제조업 자체도 다른 신제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에 가려져 있는 디스플레이 산업만 해도 그렇다. 100년 동안 디스플레이의 왕좌를 잡았던 CRT는 아날로그 시대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디스플레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와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 유기EL 등이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들 제품의 기술은 아날로그 시대와는 달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모든 산업에서 새로운 용틀임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하나 있다. 새로운 용틀임을 하는 산업들이 제대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시스템을 고쳐 나가는 것이다.

 미래 산업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PDP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업체 고위임원의 말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이 임원은 “세계시장 190억달러의 50%인 100억달러에 가까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 반도체가 국내 수출산업을 먹여 살렸다면 앞으로는 FPD가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면서 일본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산공정의 개선과 기술개발에 몰두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꼭 하는 말이 있다.

 오히려 정부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유인즉 PDP TV를 사치품으로 보고 고율의 특소세를 물리고 있어 내수시장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내수시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위험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초기산업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업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부는 세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무조건 안된다면서 기업들의 이야기를 외면하기 일쑤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기업들을 지원해 줄 수 있다. 지금 당장 세수가 조금 줄어들지 모르지만 시장을 키워 놓으면 오히려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더구나 줄어든 세수는 얼마든지 우리의 시스템을 고침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 비단 이런 일들이 PDP산업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새롭게 싹을 틔우고 있는 산업분야에선 정부의 지원책이 부족하거나 오히려 부처간 경쟁으로 넘쳐나기도 한다. 이래선 불안감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내디뎌야 한다. 싹을 틔우고 있는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먼저 시스템을 하나둘씩 고쳐 나가야 한다. 그래야 널리 퍼져가고 있는 미래산업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