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축구와 엘리트 사무관

 2002년 월드컵 리허설인 컨페더레이션컵 경기가 벌어지면서 온통 축구가 화제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대표팀 감독 히딩크가 개막전에서 세계 최강 프랑스에 5대0으로 대패했지만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격려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 현상이다. 한달에 1억원을 받는 외국인 감독 히딩크이기에 이 정도의 참패라면 경질설을 포함한 비난여론에 시달릴 만도 한데 상황은 그 반대이니 말이다. 국민이 히딩크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축구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히딩크가 강조하는 것은 ‘생각하는 창조적 축구’다. 프랑스가 보여주듯 세계 축구의 흐름은 선수 개인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전술 활용력을 극대화하는 것인데 종전의 한국축구는 전문가들로부터 ‘로봇이 경기한다’는 극언을 들을 정도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줄 아는 국민은 세계 조류에 한참 뒤처져 있는 한국축구를 비로소 ‘세계화’하려는 히딩크를 아직은 신뢰하고 있기에 비난 보다는 애정이 앞서고 있는 셈이다.

 어디 축구뿐이랴. 요사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너무 어지럽다. 예컨대 명색이 집권여당이라는 민주당은 연속되는 실정으로 민심 이반까지 들먹이면서 네탓 내탓 싸움에 바람 잘 날 없다. 야당이라고 해봐야 사정은 똑같아 국민에 희망을 주기는커녕 면박받을 정치적 해프닝만 벌이고 있다. 국가 지도세력이 이 지경인데 나라가 망하지 않고 굴러가는 것이 신기하다는 자조섞인 한탄이 국민 입에서 절로 나오는 판이다. 과거의 한국축구 수준과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이를 IT 시각에서 접근하면 둘다 세상은 디지털인데 아직도 아날로그에 머무른 탓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히딩크 축구에 국민이 희망을 갖고 있듯 우리 사회에도 미래를 향한 밝은 비전이 숨쉬고 있다. 얼마전 동아일보가 보도한 행시출신 30대 공무원의 삶과 의식 기사에는 우리 사회 엘리트 집단인 30대 관료들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일부는 “사무관이 아니라 사무원이다” “사명감으로 박봉을 감수하고 있지만 대기업 친구들이 부럽다”고 하소연하지만 많은 사무관들은 “국가 정책 수립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일부 ‘미꾸라지’ 탓에 관료사회가 무능 부패집단으로 비쳐지면서 동네북 신세가 됐지만 앞으로 한국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 사무관들은 국가에 대한 사명감과 일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 최고 엘리트집단인 30대 사무관들에게 과거 한국축구가 그랬듯이 ‘애국심과 사명감’만 강조해 봐야 그들도 훗날 장차관이 됐을 때 여전히 후진적 관료주의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날로그 수준이다. ‘정신력과 투지’로 뛰던 과거의 한국축구는 세계 초일류와의 경쟁에서 5대0이라는 스코어로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다. 엘리트 30대 공무원도 생활인이고 국민이다. 공직생활의 자부심을 이어갈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유학 등 국가의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공직사회에도 히딩크가 등장해야 할 것 같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