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니혼게이자이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세계 최대 ADSL사업자인 한국통신이 일본시장에 진출한다”는 다소 호들갑스런 제목의 기사를 일제히 내보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는 “광대역서비스의 기수 도쿄메틀릭이 소프트뱅크에 인수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3일, 이번에는 무대가 바뀌어 한국언론이 바통을 받았다. 일본 민주당 소속 나이토 참의원과 NTT사원 30여명이 하나로통신을 방문, 한국 ADSL현황을 살피고 ‘ADSL신화’를 창조한 신윤식 사장에게까지 질문공세를 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 일본은 세계 최정상급 IT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통신서비스에 관한 한 늘 기술고립을 자초하거나 흐름을 잘못 짚어 골탕을 먹었다. 이동전화시장에서 독자규격을 고집해 왕따를 당했고 초고속정보통신 역시 종합정보통신망(ISDN)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해 엄청난 설비 투자를 감행했지만 이미 한물간 기술로 전락, 한국에조차 광대역 통신인프라가 뒤진다고 야단법석이다. 이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도쿄메틀릭의 ADSL에 유난히 애정을 기울였다. 99년 이 회사가 기존 전화선을 이용해 초고속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광대역 서비스에 나설 당시부터 기사화에 적극적이었고 간판을 내리는 순간까지 ‘중계’에 나섰다. 일본 언론은 도쿄메틀릭이 2만8000여명의 가입자에 50만회선의 설비투자를 단행, 부채가 40억엔에 이르러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고 좌초 이유를 진단했다. 그러나 ADSL시장이 뜨게 되자 거인 NTT가 진입했고 NTT는 명성에 걸맞게 시장 참여 반년 만에 도쿄메틀릭을 압도, 승부가 판가름났기 때문이라는 업계의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일본 ADSL시장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선진국’ 한국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어 흥미롭다. 세계 최초로 ADSL을 상용화한 한국 역시 후발주자인 하나로통신이 먼저 선풍을 일으켰다. 막대한 시설 및 마케팅 비용을 들여 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이 개화기에 접어들자 한국통신이 나섰고 한국통신은 불과 1년여 만에 하나로를 앞지른 것도 모자라 과점체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도쿄메틀릭은 소프트뱅크에 흡수됐지만 하나로통신은 통신 3강체제라는 구조조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1위 거대 사업자에 대한 ‘쏠림현상’이 유달리 심한 통신시장의 특성상 앞으로의 추이도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양상을 나타낼 것이다. 일본의 경우 세계 최대사업자인 한국통신이 공략에 나서더라도, 소프트뱅크가 도쿄메틀릭을 환골탈태시켜 재진입하더라도 ADSL시장의 승리자는 여전히 NTT가 될 것이다. 한국 역시 하나로, 데이콤, 두루넷, 드림라인 등 후발주자들이 아무리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 해도 한국통신의 위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의 속성상 그리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독과점 문제뿐이다. 시장에서 유효경쟁이 사라지면 소비자에게도 그 피해가 돌아간다. 다행히 아직은 한국통신이나 NTT 모두 공기업이다. 정부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기업은 약속이나 한 듯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고 그래서 한-일 양국 정부는 당분간 자유시장 경쟁과 유효경쟁체제 지속이라는 이율배반적 숙제를 안고 씨름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