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논설위원 jspark@etnews.co.kr
묻는 사람은 꼭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대답을 하는 사람도 대답을 듣기 위해 묻지 않는다. 그럴수록 따지는 측은 목소리를 더욱 높이고 당하는 측은 자세를 한층 낮춤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우리 국회의 국정감사 모습이 바로 그렇다.
국회의원은 국감을 당략이나 입신의 방편으로 삼고 또 대답을 하는 장관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자리를 보전받는다. 그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국민은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부실 정권이 부실 기업을 낳듯, 부실 국회가 부실 국가를 만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번에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정보통신부 국감에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당의 김희선 의원이 “이동전화 단말기 보조금을 일부라도 지급을 허용함으로써 단말기 보급확대로 부품업체의 경영난을 해소하고 수출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 한나라당의 김영춘 의원도 “보조금 지급을 통해 단말기 제조회사 및 대리점들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들은 “경제를 회생시켜야 할 판에 정부가 단말기 보조금 지급을 금지함으로써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같은 주장은 그것으로 인해 수혜를 기대하는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음직하다. 그러나 모처럼 여야가 당이나 자신의 입장을 떠나 공동의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현안에 천착한 것 같진 않다.
지금 우리 경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불황타개가 화두다. 마치 지난 90년대 초의 일본경제와 상황이 아주 비슷하다. 80년대에 고도성장을 했던 일본은 93, 94년에는 경제성장률이 0.4%와 1.6%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길고도 긴 불황의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일본 국민들은 시름에 잠겨야만 했다.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부동산 가격이 크게 떨어졌으며 민간투자도 줄었다. 이로 인해 개인의 자산가치가 폭락하면서 소비가 크게 감소했다.
그렇게 되자 일본 정부는 내수를 진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방책으로 수출 증대와 감세를 내세웠다.
불황에 처한 우리가 일본을 흉내냈는지 아니면 그밖의 방법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양국의 경기부양 처방은 거의 비슷하다. 우리가 일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말기 보조금 지급을 허용해야 한다는 국회의 주장이다.
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금하는 것은 행정규제라는 시각도 있다. 통상 정부가 국민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규제를 실시하지만 그것은 자유경쟁을 제한해 사회적 비용을 높인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은 근래에 들면서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있다. 그러나 보조금 지급은 일부 장비업체나 부품업체에 득이 되지만 이동전화사업자에게는 부담이 되며 특히 국민들의 부담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보조금을 지급해서라도 경기가 부양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본이 장기간의 불황에 처했을 때 국민들은 싸고 좋은 물건이 아니면 사지 않았다. 그것도 꼭 필요한 물건만 샀지 그렇지 않은 것은 가격만 내린다고 해서 구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단말기 보조금 문제는 크게 보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불황에 처하면서 예전의 ‘성장제일주의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단말기 보조금 건을 둘러싼 논쟁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보조금이 장기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든 관계없이 단기간에 내수 경기를 부양하고 수출을 늘리면 그만이다는 생각이 각계에 퍼져 있다.
과거 재벌에 경제력이 집중됨으로써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던 것도 ‘경제회생’과 ‘수출강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체제에서는 효율성 증대가 제일의 가치였다. 정부가 효율성을 강조하는 정책을 펴면 아무래도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유리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또 다시 재벌에 부가 편중돼 소외받는 계층이 늘어날 것이다.
최대의 이권사업이라 하는 IMT2000사업자 선정이나 구조조정, 비대칭 규제 등도 결과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맥을 같이 한다. 이제 불황은 경제회생과 경기부양이라는 명분을 업고 경제력 집중이라는 해묵은 문제점을 잉태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경제회생이라는 말 앞에서는 누구도 어떤 바른 말도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