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iztoday.com=본지특약] 사생활 보호가 우선인가 아니면 범죄자 감시가 우선인가. 수년 전부터 끊이지 않고 있는 암호화 기술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미 테러사태를 계기로 다시 뜨거운 조명을 받고 있다.
이같은 논란은 암호화 기술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모순 때문이다. 디지털 정보의 암호화는 사생활 보호를 바라는 일반의 이익에 부합하면서도 테러리스트 등 범죄 용의자가 정부 당국의 감시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데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테러참사로 입지가 강화된 미 정보기관 등 시민의 자유보다는 국익을 우선 생각하는 측에서는 범죄자들이 암호화 기술을 악용할 가능성을 지적하며 암호화의 허용범위를 제한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기업체나 일반인 가릴 것 없이 자료나 음성을 암호화하는 기술은 이제 컴퓨터 보안분야에서 핵심기술로 자리잡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사생활 보호라는 공익적인 취지에서 출발한 암호화 기술은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한 정보기관이 이미 오래 전부터 미 의회에 고도로 발전한 암호화 기술로 인해 테러범 등의 범죄활동을 감시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의회차원의 대책마련을 요청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암호화 법안 마련을 주도해온 공화당의 저드 그레그 상원의원은 “암호화 기술 개발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암호화 기술이 워낙 급속히 발전하고 있어 종전의 기술은 쉽게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살공격을 감행한 테러범이 암호화 기술을 이용해 정부의 통신감시망을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나 FBI는 이에 대해 아직 확실한 언급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대표적인 PC용 보안프로그램인 ‘PGP(Pretty Good Privacy)’를 개발한 주역인 필립 지머맨은 “그처럼 극악무도한 테러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굳이 암호화 기술까지 동원해 활동을 은폐하려 했을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레그 의원은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암호화 법안에는 암호화업체들에 대해 ‘비밀통로’를 반드시 포함시켜 제품을 생산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범죄 용의자나 테러리스트가 암호화 기술을 사용해 공권력의 정보 접근을 차단하더라도 정부기관만은 비밀통로를 통해 암호화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앞서 클린턴 행정부도 지난 93년 정보당국과 시민단체간에 암호화 허용범위를 놓고 치열한 논란이 벌어진 가운데 범죄자 감시를 위해 암호화 전문업체들이 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정부기관이 암호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만능열쇠’를 정부기관에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 법안은 강력한 암호화 성능을 지닌 제품의 수출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암호화업체와 소비자들이 정부가 언제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비밀통로가 내장된 암호화 프로그램에 거부감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부당국의 감시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암호화 프로그램을 어떤 범죄자들이 사용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의 암호화업체들은 이미 외국업체들이 강력한 성능을 지닌 암호화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법안 국외유출 금지조항도 유명무실하다고 지적했다.
암호화 전문가인 조지타운대학의 도로시 데닝 교수 역시 클린턴 행정부의 만능열쇠 법안을 지지했지만 암호화 문제는 그 당시에 매듭지어졌다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데닝 교수는 “암호화 규제여부는 이미 수년 전에 충분히 합리적인 분위기에서 논쟁을 거친 문제”라며 “암호화를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당시의 결론이었다”고 상기시켰다.
그러나 공화당의 그레그 의원은 “이 문제는 점차 지능화되는 테러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다시 거론해야 한다”며 “시민의 자유와 국익 보호라는 두가지 측면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법제화를 추진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그레그 의원이 구상하는 방안은 의회 안에 미 대법원이 구성하는 준사법기구를 설치, 암호 만능열쇠의 사용권을 인가하도록 함으로써 공정성 시비를 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완벽한 것이란 없다”며 만능열쇠조차도 범죄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쓸모없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암호화 전문가들은 이번 테러사태를 계기로 범죄자에 의한 악용을 막으면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는 암호화 기술 활용방안이 마련될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고 지적하면서도 이같은 논의가 공권력의 지나친 간섭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당초 인권보호차원에서 PGP를 개발한 지머맨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범죄자에 의해 악용되는 문제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며 “오늘날에도 많은 인권단체들이 PGP를 사용하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시민단체들도 공권력의 감시권을 일방적으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제화가 이뤄질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미 정부의 암호화 규제 추진이 과연 성공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미 전역의 150여개 시민단체들은 지난주 미 의회에 모여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법안의 추진에 신중을 기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암호화 규제 법안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마이클최기자 michael@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