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방송수신용 세트톱박스 업계가 잇단 악재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MPEG LA의 국내업체에 대한 로열티 징수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초긴장 상태에 빠졌던 세트톱박스 업계는 미국이 중동지역에 대한 보복전쟁을 벌일 것이 확실시되자 또다시 위기상태에 빠졌다. 매출의 대부분을 중동지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국지적 보복을 가한다는 입장에서 이라크 등으로까지 보복 지역을 확대할 조짐을 보이자 업계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D사 사장은 “중동 침공 임박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다”며 “중동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한숨만 쉬었다.
국내에서 위성방송수신용 세트톱박스를 중동지역에 판매하는 업체는 줄잡아 90여곳. 이중 절반 이상이 세트톱박스 한 품목에만 사활을 걸고 있고 수출실적의 50∼80%를 중동지역에서 거두고 있으니 이럴 만도 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국내 최대의 세트톱박스 업체인 휴맥스는 지난 20일 투자자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해명성 보도자료까지 냈다. 자사의 주 판매지역은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이므로 안전하고 걸프전 때도 매출이 오히려 늘었으며 수출이 이뤄지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항은 걸프전 때도 폐쇄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될 뿐이다. 이번 전쟁은 걸프전과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서방 주요언론의 보도인 것을 보면 그리 낙관할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90년 걸프전이 발발할 당시 위성방송 수신기가 특수를 누렸던 것은 서방뉴스를 볼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비롯해 다양한 미디어가 보급돼 위성방송 수신기를 꼭 사야 할 이유는 줄어든 지 오래다.
오히려 투자자들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중동지역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시장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유럽시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최근 미국시장 진출에까지 성공한 휴맥스조차 이런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시장은 중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경기는 바닥으로 치닫고 전세계에 전운이 감도는데도 국내 이동통신 업체들은 중국시장에서 유례없는 판매상승세를 거두고 있는 것을 보라. 더구나 뜬구름 같은 그레이마켓에 불과한 중동지역에 왜 연연하는가. 기술력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무늬만 세트톱박스 업체였던 곳이 아니라면 이슬람은 잠시 잊자.
<생활전자부·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