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는 악당인가, 희생양인가.
지금까지 하이닉스는 ‘악당’ 이미지에 가까웠다. 미국을 비롯한 외신과 투자분석가들, 특히 한국 반도체업체와 직접 경쟁하고 있는 기업을 가진 나라일수록 하이닉스의 어두운 면과 한국정부의 지원 의혹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하이닉스를 지원한다면 한국 경제도 위태로워지고 WTO 협정에도 위반된다는 논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전파되고 있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기아·대우 사태의 교훈을 되살린다면 한국 경제의 충격파를 줄이는 방향이 무엇인지 자명하고 그 연장선에서 하이닉스를 처리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쯤 되면 하이닉스는 부실과 ‘돈 먹는 하마’쯤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이 같은 ‘하이닉스 때리기’는 너무 일방적이다. 손가락질과 흥분은 금물이다. 냉정히 사태를 따져보고 계산해야 한다. 졸속처리는 후회만 낳는다. 한국을 먹여살리는 것은 절반이 반도체다. 세계 최강의 경쟁력과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하이닉스를 퇴출시키고 삼성만 남아서도 여전히 한국 경제의 젖줄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부터 점검해보자. 대우와 기아는 고용문제가 최우선 순위였지만 하이닉스 처리는 향후 우리 경제의 틀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시장 상황 역시 간단치 않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반도체 가격 탓에 삼성전자·하이닉스·마이크론·인터피온·NEC 등 빅5 모조리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삼성전자마저 3분기에 3800억원의 영업적자로 돌아섰다. 마이크론과 인터피온은 하이닉스보다 더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계 반도체업체들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 싸움에 돌입했다. 삼성을 제외한 빅4가 모두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려 있으니 누군가는 쓸러질 것이고 여기서 버텨내면 시장이 호전되는 시점부터 다시 한번 ‘대박’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미국·독일 같은 냉혹한 자본시장의 나라에서 몇억달러 규모의 누적적자가 계속 되는 데도 기업이 퇴출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반도체는 특성상 호황 1년으로 10년 적자를 모두 만회하고 다시 10년 먹고 살 돈을 챙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삼성·마이크론·인피니온은 아직 감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감산을 통해 수급불균형을 해소해야 가격이 회복될텐데 누구 하나 ‘죽어나갈 때’까지 서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만만한 타깃은 하이닉스가 된다. 일부 외신은 하이닉스가 쓰러지면 반도체 시장이 30% 이상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 기사까지 내놓고 있다. 이를 두고 “모두들 하이닉스 희생양 만들기의 공모자처럼 보인다”고 혀를 차는 사람도 많다. 하이닉스 퇴출의 과실 차지에만 정신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선택은 정부의 몫이다. 더이상 미뤄서는 곤란하다. 국가 전략산업으로 반도체를 끝까지 안고 가야 한다면 눈치 보지 말고 살려야 한다. 9·11테러 여파로 자국 항공산업이 어렵자 미국도 정부가 직접 나서 자금을 지원했다. 누구하나 WTO 운운하지 않았다. 하이닉스와 아메리카에어라인의 경우 무엇이 다른가. 만약 죽여야 한다면 그것도 속전속결로 시행해야 한다. 그래야 충격이 덜하다. 어정쩡하게 경쟁사·경쟁국의 ‘하이닉스 때리기’만 속절없이 바라볼 때가 아니다.
<이택부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