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논설위원 jspark@etnews.co.kr
요 며칠 돌변한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꼭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경기를 반영하는 듯하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직장을 잃어 실의에 처한 사람들은 수은주가 급강하하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뿐 아니라 기업가나 봉급생활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황에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같은 때는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난처하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언론기업으로서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경제문제 기사를 다루는 부서는 더욱 그렇다. 자칫 좋지 않은(?) 기사라도 나가면 ‘그것 때문에 경제가 더 나빠진다’느니, ‘기업을 죽일 작정이냐’느니 하는 항의에 부딪히게 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을 수도 있지만 때론 그런 기사가 국가 경제나 기업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빌미를 잡히지 않으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소위 좋은(?) 기사를 많이 내보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것은 사실 불황에도 불구하고 비판할 수 있는 용기를 포기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두운 기사는 때론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중을 줄여서 내보내는 일이 많아진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이 중복투자됐다는 감사원의 특감 결과를 언론에서 조그만하게 보도한 것도 아마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초고속정보통신망은 정보사회의 대표적인 인프라로서 그것이 잘못돼 가고 있는데도 방관하거나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다. 그 사업은 투자 규모가 무려 30조원에 이른다. 정보사회에서 ‘정보고속도로’역할을 하는 초고속정보통신망이 잘못 구축되면 정보사회의 기반 차제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정부는 우리나라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발표해왔다. 투자 시기가 빠르고 투자 규모도 작지 않은 점을 들었다.
그런데 점검해보니 그 내용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 중복투자가 이미 1000억원을 넘었고 앞으로 2005년까지는 무려 8000억원을 넘을 것 같다는 것이다. 또 속도가 생명인 초고속정보통신망임에도 제 속도가 나지 않고 민간공중망과 국가망 사이의 연계가 미흡하다.
감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효율적 투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이 다름아닌 중복투자임은 두 말할 나위없다.
벌써 3년 전쯤 일이다. 국내 굴지의 통신업체 대표가 필자에게 “우리나라는 정보사회에서 발전할 수 있는 인프라를 충분히 구축하고 있으니 얼마든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복투자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단서를 붙였다.
그러니까 초고속망 구축 초창기부터 중복투자 문제는 이미 노출돼 있었고 그런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언론에서도 과잉·중복투자 문제를 지적했지만 정부는 거의 ‘묵살’로 일관한 듯했다. 지금까지 초고속망사업이 유망할 것으로 본 사업자들이 이 사업에 잇따라 참여함으로써 중복투자가 심화됐으나 정부는 ‘사업자 자율’에 맡겨뒀다. 규제를 마다하지 않던 정부가 이 문제에서 만은 예외였다.
정부의 그 잘난 ‘사업자 자율’이라는 정책의 결과는 이제 초고속망 사업자의 부실과 국민의 세금 낭비, 제 속도도 나지 않는 망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찌하여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도 다 아는 초고속정보통신망 중복투자문제를 정부가 그렇게까지 외면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