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3000여년에 걸쳐 농사를 본업으로 해오면서 새해를 맞는 설날이 되면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를 열게 된다.
농악대 맨 앞을 선도하는 높은 장대에 드리워진 휘장의 글귀는 ‘농업천하지대본(農業天下之大本)’이다. 때로는 ‘농업’ 대신에 ‘농자(農者)’로 쓰기도 했다. 농업과 농부가 지구상의 으뜸이라는 그야말로 조상님들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낸 가장 멋들어진 표현이라 생각된다.
300년의 산업사회라는 과도기를 거쳐 우리 인류는 또 하나의 신기원을 수립했다. 농사를 지어온 역사에 비해 100분의 1에 해당하는 30년 사이에 우리는 정보사회라는 기상천외한 세상을 창조하고 말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나랏님들의 통치구호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적절하게 변해온 것이 사실이다. ‘북진통일’에서 ‘조국 근대화’로, ‘새마을 운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경제 살리기’에서 ‘햇볕정책’으로 변모를 거듭하며 발전해 왔다.
벤처기업 육성도 그러한 구호와 맥을 같이 하면서 마치 ‘벤처 새마을운동’처럼 추진돼왔다.
1990년대 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벤처 바람은 세기의 강을 건너면서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 심지어는 정치판까지 뒤흔들어 놓는 폭풍으로 변모하였다.
지난해 12월 12일에는 코스닥 등록기업 수가 700개를 돌파하면서 거래소 상장기업 수를 추월하는 하극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은 우리의 벤처산업이 그 일천한 역사에 비해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 어느 정도 몸집으로 변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래 규모면이나 기업의 시장가치 면에서는 아직 비교가 되지 못할지라도 수에서 큰형님을 따돌리고 상좌에 앉게 된 것은 우리 벤처기업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제 정부가 인정한 벤처기업 수만도 1만1000개를 넘었다고 한다. 국민 정부의 벤처육성 목표는 2만개다. 정부에 아직 등록하지 않은 벤처기업의 수를 따져보면 2만개는 족히 넘는다. 이것 또한 재래 중소기업 수에 비하면 속된 말로 고목나무에 매미 붙은 정도에 불과하지만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력을 계산해 보면 작은 거인임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한다.
지난 2000년대 초반은 벤처의 성장기였다. 빨리 커보겠다는 과욕으로 인해 부작용도 많았다. 잔병치레도 많이했고 죽을병도 걸려 보았다. 많은 죽음도 지켜 보았다. 수많은 닷컴의 시체를 보면서 벤처무상이라는 한숨도 많이 뱉었었다.
온갖 ‘게이트’도 겪었다. 문(gate)은 왜 그리도 많은지, 열고 또 열어도 계속 되는 문, 열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참 주인인 몸통은 정말 계실 것인가.
2002년 임오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 우리나라에는 월드컵과 대통령선거라는 두 개의 큰 국사(國事)가 기다리고 있다. 월드컵은 우리의 생활수준을 선진국으로 도약시킬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대통령선거는 정보기술(IT) 산업을 경제에 접목시켜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을 차기 국가 최고경영자(CEO)를 뽑는 국가적 대사다.
국민의 정부가 뿌려놓은 벤처정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국가 CEO가 당선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국사 못지않게 우리네 벤처 동지들이 스스로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있다. 이렇게 외치고 실천하는 일이다. “벤처 본심(本心)으로 돌아가자”.
고리타분한 스캔들 같은 것은 과거지사로 날려 버리고 벤처정신으로 똘똘뭉쳐 ‘제 2의 벤처시대’를 만들어 가자. 농경시대 조상님네들이 설 명절에 높다란 휘장에서 뽐내 보였듯이 우리도 이런 문구로 임오년 새해의 벤처발전을 기원하자. ‘벤처천하지대본!’
<숭실대 교수 oh@computing.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