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침체에 들어서 있는 일본 경제의 갈 길은 올해도 험난하다. 불황의 터널 속에 들어선 지 이미 10년을 넘어섰지만 아직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해 경제 성적표는 이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경제성장률은 결국 마이너스 2% 이하로 떨어졌고, 완전실업률은 5.4%까지 치솟았다. 엔화도 약해질대로 약해져 1달러에 130엔대까지 추락, 150엔까지 떨어질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기축통화를 꿈꾸던 엔화가 이제는 아시아의 골칫거리자 화약고로 변해버린 셈이다.
위기감이 일본 열도 전체를 휩쓰는 가운데 조타수를 잡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하다. 따라서 고이즈미호가 최근 내놓은 2002년 긴축재정안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말 각료회의를 통해 결정된 2002년도 일반회계예산의 정부안을 보면 총액이 81조2300억엔으로 작년 대비 1.7% 감소했다. 특히 일반 세출의 경우 전년 대비 2.4% 줄어든 47조5472억엔으로 책정돼 1조1117조엔이라는 최대 폭의 삭감액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런 긴축재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진흥비를 5.8% 늘어난 1조1779억엔으로 책정됐다. 구체적으로 과학기술 연구자를 위한 ‘경쟁적 자금’이 5.5% 늘어난 3446억엔, 대학 등 독창적 연구를 보조하는 ‘과학연구비보조금’이 7.8% 늘어난 1703억엔에 이른다. 또한 대학이나 연구기관을 모태로 한 벤처기업을 3년간 1000개사를 창업하자는 이른바 ‘대학 모태의 벤처 1000개사 계획’에 259억엔을 투자하고 이를 지원키 위한 제도 정비에 119억엔을 책정했다. 이외에도 산업경쟁력 강화와 지구환경보존을 위해 생명과학, 정보통신, 환경, 초미세과학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352억엔을 투자키로 결정했다.
여타 분야가 대부분 예산이 삭감되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IT, BT 등 과학기술 분야 증액은 고이즈미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와세다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히가시데 히로 교수는 “이미 정부지원으로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한 대학 중심의 첨단산업단지가 육성되고 있다”며 “지난해 12월 설립된 와세다 인큐베이션센터에서 볼 수 있듯 벤처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히가시데 교수는 또 “증액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환영하나 이제부터는 이 자금을 어떤 분야에 어떤 방식으로 효율적으로 쓰느냐가 고이즈미 정권의 숙제”라고 지적한다.
이런 고이즈미 총리에게 지난해 12월 더없이 반가운 뉴스가 도착했다. 노요리 료지 나고야대 교수가 2001년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것. 지난해 시라카와 히데키 교수에 이어 노벨화학상 부문을 2년 연속 일본 과학자가 수상함으로써 과학기술을 통한 일본 재건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고이즈미 내각의 이번 정부안을 오는 21일 소집 예정인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국회내에서는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의 긴축재정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비판이 비등하고 있다. 또 고이즈미 내각이 추진하는 구조개혁의 고통을 일본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체력이 있는지에 대한 회의도 일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 경기회복이 예상외로 장기화될 경우 올해 일본 경기는 지난해보다 더욱 혹독한 환경을 맞게 된다. 해외투자자들은 이미 일본 기업의 생산성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좀처럼 ‘바이 재팬’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IT벤처를 육성,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고이즈미 총리의 2002년 희망 찾기는 이미 시작됐다.
<성호철 통신원=도쿄 sunghoch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