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령탑을 맞은 거대 통신기업 BT의 행보에 영국 IT업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 전화회선 해외 매각, 방송업계 진출, 회사 분할 등 영국 IT업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올 BT의 대변신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BT는 과도한 부채 누적과 거듭되는 주가 하락, 통신시장 침체에 따른 영업부진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렸으며, 이에 따라 최고경영진의 전면적인 교체를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단행한 바 있다. 새로운 BT의 위상을 정립할 이사회 회장으로 전 BBC 회장 크리스토퍼 블란드가 임명됐으며, BT의 구조개혁을 진두지휘할 CEO에는 네덜란드 출신 기업인 벤 버와이엔이 전격적으로 발탁됐다. 또 적극적인 해외 자산매각을 통한 부채삭감 노력과 함께 기존 이동통신사업의 자회사로의 이관, 임원진 개편 등과 같은 인적·물적 구조개혁 조치 역시 이뤄졌다.
이런 구조개혁을 바탕으로 지난주 블란드 회장은 올해 BT가 방송업계로 진출해 통신·미디어·인터넷을 동시에 제공하는 종합통신미디어업체로 거듭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는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BT는 NTL이나 텔레웨스트(Telewest)와 같은 경쟁업체가 초고속인터넷과 전화서비스, 그리고 TV서비스를 함께 제공하고 있는 것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방송업계로의 진출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 블란드 회장 취임 이후 영국 IT업계에서는 BT가 자체 네트워크를 이용한 TV 프로그램보급사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영국의 케이블 및 위성TV 시장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가운데 하나인 데다 블란드 회장 본인이 BBC에서 4년, 런던 위켄드TV에서 10년간 회장으로 재직한 전문방송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선데이타임스를 통해 밝혀진 블란드 회장의 구상은 이 같은 루머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실제로 그는 “BT가 기존 유선방송업체들처럼 타업체의 프로그램을 단순히 배급할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별도의 완전한 위성방송업체를 설립해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배급하거나 타업체의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BT의 의도가 종합방송업체로의 발돋움에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BT의 새로운 CEO로 내정된 버와이엔은 블란드 회장보다 더욱 급진적인 개혁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옵저브의 보도에 따르면 버와이엔은 BT의 국내 전화회선을 해외에 매각하는 방안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으며, 매각이 성사되면 BT의 유선전화판매사업을 기존 전화회선보급사업에서 떼어내 별도의 회사로 독립시킬 방침이다.
BT의 전화회선 매각은 지난해 중순 독일의 국영은행인 베스트도이치란데스방크지로젠트랄레(WestLG)가 전화회선 매각료로 250억파운드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처음 불거져 나왔다. 당시 블란드 회장은 BT의 이동통신사업을 자회사인 MMO2로 이관하는 것이 더욱 급하다는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연기했다.
그러나 런던 금융시장에서는 WestLG의 제의가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버와이엔이 BT의 CEO로 취임하게 되면 이 문제의 해결 역시 급류를 탈 것으로 보고 있다. WestLG는 BT의 전화회선을 매입하는 경우 이 중 일부는 다시 BT에 임대하고, 나머지는 여타 통신업체에 개방할 방침이다.
BT의 전화회선 매각이 성사될 경우 IT시장에 미칠 영향은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현재 영국의 인터넷 및 이동통신 등 IT서비스의 대부분은 BT의 전화회선에 의존하고 있고, 이에 따라 BT의 시장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BT의 전화회선 매각은 이런 BT의 시장 영향력 소멸을 의미하며, 따라서 향후 누가, 어떤 방향으로 영국 IT산업을 주도하게 될지 예측불허의 상황이 초래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 IT업계 전체가 새로운 BT 경영진의 행보를 주시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