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IT기업 CEO를 만난다>(4)피오리나

 

 ‘컴팩과의 합병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최고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칼리 피오리나 휴렛패커드(HP) 회장 겸 CEO의 올 한해 최대목표는 당연 컴팩과의 합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루슨트에서 명성을 날리던 그녀가 HP 사령탑을 맡은 것은 꼭 2년 6개월전인 99년 7월말. HP 부임후 그녀는 전임 CEO 루 플랫이 추진한 130억달러 상당의 애질런트 분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등 HP혁신에 일로매진해 왔다. 쾌속순항을 하던 그녀에게 첫번째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지난해의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인수 좌절. 당시 피오리나는 HP의 IT 서비스 사업 강화를 위해 180억달러라는 거금을 투입, 세계적 컨설팅업체 PwC를 매입하려 시도했으나 액수가 너무 커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그녀는 생산라인 축소, 감원 등의 대대적 군살빼기를 단행하며 HP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왔다. 일각에서는 그녀의 혁신적 작업을 일컫어 “실리콘밸리 중심지에 위치한 HP 본사의 오렌지, 브라운색의 카펫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려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하고 있다.

 세계적 여걸인 피오리나가 만일 지난해 9월 3일 발표한 컴팩과의 합병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CEO 자리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컴팩과의 합병 성공은 일생의 승부수가 되고 있다.

 불굴의 투지로 유명한 그녀는 합병 반대 움직임이 불거지는 요즘에도 “후퇴는 없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합병이 잘 될 것 같으냐”는 C넷 기자와의 신년 인터뷰에서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며 강한 자신감을 표출했다. 피오리나는 컴팩과 합치는 것이 HP의 제품과 서비스 영역을 확장, HP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주주·애널리스트 등을 상대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HP의 지분 18%를 가지고 있는 월터 휴렛 HP 이사 등은 “직접판매와 주문판매로 성공하고 있는 델컴퓨터와 IT서비스 분야 강자 IBM과 경쟁하기에 합병은 좋은 무기가 안된다”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합병 반대론자들은 특히 HP가 지난 63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HP웨이’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할까 걱정하고 있다. 피오리나는 이에 대해 “상황 변화에 맞춰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결코 HP웨이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경영진과 종업원간의 문턱을 낮춘 ‘개방성’과 양자간의 합의를 중요시하는 ‘컨센서스’를 특징으로 하는 HP웨이는 많은 기업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기업문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경기침체 여파로 인한 거센 해고 바림과 함께 임금삭감으로 HP 내부에서조차 ‘더 이상 HP웨이는 없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피오리나의 혁신 작업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도 물론 많다. 살로먼스미스바니의 존 조네 애널리스트가 대표적인데 그는 “10년전에 벌써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피오리나가 하고 있을 뿐”이라며 “루 거스너가 지난 93년 IBM CEO에 부임했을 때도 일부 애널리스트와 언론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 IBM의 주가는 당시보다 10배나 뛰어 올랐다”며 피오리나를 두둔하고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합병이 성공한다해도 피오리나의 앞길은 결코 장밋빛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고민이 더 커지거나, 어쩌면 시작일 수도 있다. 양사는 이미 합병사 출범후 약 1만5000명을 감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이질적인 기업문화를 하나로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HP와 합치려는 컴팩의 경우 이미 수년전에 디지털이큅먼트를 인수하면서 통합에 있어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 컴팩은 서비스 사업 강화를 위해 디지털이큅먼트를 인수했지만 양자간의 통합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피오리나는 이에 대해 “합병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통합을 잘못 조정한 당시 컴팩의 CEO 파이퍼에게 책임이 있다”고 항변하며 “컴팩과의 합병 작업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위험에 닥쳐봐야 그 사람의 참모습이 나타난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불과 2년 앞둔 그녀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 세계최고의 여성 CEO라는 수식어를 증명할지 주목되고 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