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엔화 약세와 주가 하락이 올해 들어서도 그치지 않고 진행되고 있어 일본 경제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지난 23일 일본 경제는 일본 경제신화의 상징이었던 두 축, 엔화와 주가의 침몰을 지켜봤다. 엔화와 주가는 80년대 막대한 무역 흑자를 바탕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 일본 경제의 힘을 대변했던 키워드. 이날 엔화는 달러당 134엔을 돌파, 98년 10월 6일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도쿄주식시장에서는 종합주가지수인 토픽스(TOPIX)가 전일대비 9.93포인트 하락한 975.20을 기록, 버블 경제 붕괴후 최저치인 98년 10월 15일의 980.11을 경신했다. 이는 85년 이후 최저치다.
◇바닥이 안 보이는 하락=엔화는 지난해말 달러당 130엔선이 무너지면서 하락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뚜렷한 반전없이 가치 하락이 이어져 134엔까지 밀려나 135엔대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올해초 130엔대를 지키던 엔화 가치가 단 3주동안 4엔이나 하락한 것에 대한 우려가 일본내에서 퍼지고 있다. ‘미스터 엔’으로 불리던 전 대장성 재무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게이오대 교수는 최근 강연회에서 “경제 구조개혁이 진행되지 않으면 연말께 1달러당 150∼160엔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엔화 가치 하락의 원인으로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이 약화된 점을 들었다.
도쿄주식시장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지난해말 28일 도쿄증시 종합주가지수인 토픽스는 1032.14로 2001년도 장을 마감한 후, 지난 11일 1000선이 붕괴하는 등 하락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심리적 지지선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됐던 980선이 힘없이 무너짐으로써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했다.
닛케이 평균주가의 경우 지난해 8월 29일 1만1000엔 선이 붕괴하면서 17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지난해말 1만542.62엔으로 장을 마감했다. 이후 23일 현재 1만40.91엔을 기록하며 지속적인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원인=현지 언론들은 엔화 가치 하락의 원인을 오닐 미국 재무부 장관이 23일 한 강연에서 엔저현상을 명확하게 부정하지 않아 미국과 일본 정부가 엔저현상을 사실상 용인했다는 판단이 시장에 퍼지면서 비롯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주식의 경우 불량채권 처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는 은행주의 약세를 주요인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원인보다 일본 경제의 체력 저하라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엔화 약세의 배경에는 일본 경제 신용도에 대한 불안, 특히 금융권에 대한 불신이 있다. 지난 98년 구 일본장기신용은행이 파산을 계기로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이후 시장에는 여전히 금융권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일본 은행들이 현재 짊어지고 있는 불량채권을 무사히 처리하고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불안정한 금융환경을 가진 국가의 화폐가 가치 하락하는 것은 시장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일본 경기회복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주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경제의 뿌리를 이루는 중소업체들의 도산율이 증가하고 있다. 제국데이터뱅크가 21일 발표한 2001년 전국 기업도산 집계에 따르면 부채액 1000만엔 이상인 기업의 도산은 총 1만9441건, 부채 총액은 약 16조2130억엔에 이른다. 이는 전후 두번째로 많은 수치다. 또 상장기업의 도산은 14개사로 과거 최대다. 특히 설립 30년 이상된 중견급업체의 도산 비율(24.3%)이 과거 최대에 이르는 점 등은 일본 경제 경쟁력의 바탕이 붕괴되고 있는 징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 열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도산율은 다시 금융권에 부담으로 작용, 금융시스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금융권은 부채 회수에 나서 도산이 더욱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정부가 은행에 공적 자금을 재투입해서라도 신속하게 은행권을 안정시키고, 경영부진 기업들은 보다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쿄 = 성호철 특파원 sunghoch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