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네트웍스의 최고경영자(CEO) 로브 글레이저(40)는 ‘마이크로소프트(MS) 맨’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빌 게이츠 회장과 스티브 발머 CEO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MS의 멀티미디어 시스템 그룹 부사장까지 올랐던 글레이저가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회사를 뛰쳐나와 리얼네트웍스라는 새 회사를 설립한 것은 지난 94년.
주변 인사들로부터 그는 “진작에 MS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가 누구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회사를 만들어 책임지는 편이 더 나았다는 말이다.
글레이저는 열의를 갖고 새로운 회사에 최선을 다했다. 선견지명도 있었다. 리얼네트웍스는 인터넷 대표선수로 떠올랐다.
다만 그에게는 MS라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실제 MS는 글레이저와 그의 분신 리얼네트웍스에 있어 애증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시애틀 레드먼드에 있는 리얼네트웍스는 이웃에 인접한 MS와 경쟁해왔다.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MS에 ‘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얼네트웍스가 비록 웹 오디오/비디오(A/V) 전송기술 부문에서 명성을 얻었다고는 해도, 이는 글레이저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다른 업체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인 ‘초기 시장 선점자’로서 응당 얻어야 할 이득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큰 가치를 둘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글레이저는 MS가 마음먹고 공격에 나서면 리얼네트웍스 흔들기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같은 절박함이 글레이저와 리얼네트웍스에 가르침을 줬다. MS의 다른 도전자들이 거꾸러지는 것을 보면서 생존의 교훈을 얻은 것이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MS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뿐이었다.
사실 글레이저는 현실을 훨씬 더 일찍 깨달았다. MS로부터 독립을 추구할 때 그는 MS의 저돌성과 뛰어난 식성(?)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막강 경쟁자인 MS를 피해가면서 미디어 비즈니스를 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전략은 한계가 분명했다. 리얼네트웍스가 MS를 ‘넘지 못할 벽’으로 의식하는 한 능독적인 제품 및 기술의 개발은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시장은 인터넷 멀티미디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출범 당시 리얼네트웍스는 MS와 협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MS가 웹스트리밍 비즈니스에 주력키로 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윈도미디어 소프트웨어를 쓰라고 권고했다.
이때부터 글레이저는 MS보다 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리얼네트웍스를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전송 네트워크로 변형시켰고 소프트웨어도 다운로드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제품 품질 개선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동안 인터넷 콘텐츠는 저품질·무료의 대명사였다. 이는 AOL타임워너·베르텔스만·비방디유니버설과 같은 거대 미디어 업체들이 뛰어들면서 개선됐지만 여전히 소비자들의 요구수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리얼네트웍스는 달랐다. 그러면서도 거대 업체들의 기준에서 볼 때 리얼네트웍스는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글레이저는 거대 미디어 업체들이 리얼네트웍스의 기술에 대한 신뢰성과 MS에 대한 반감으로 리얼네트웍스 앞에 도열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장흐름을 제대로 읽은 셈이었다.
온라인 업체들은 고품질의 디지털 음악·영화 등 콘텐츠가 도용이나 불법복제 없이 잘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이는 리얼네트웍스에 있어서는 완벽한 기회로 다가왔다. 리얼네트웍스는 기대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글레이저는 “미디어 업체들에 리얼네트웍스는 (MS라는) 성벽을 파괴하는 무기였다. 음반업체들이 이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리얼네트웍스의 초기 시장주도력은 다소 줄었고 일부에서는 MS의 제품과 비슷하게 사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회사 재정상태는 여전히 좋다. 많진 않지만 최근 분기까지 경상이익을 유지했고 지난 9월에는 3억4800만달러의 현금을 손에 쥐었다.
이제 리얼네트웍스와 글레이저 앞에 놓여진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요 미디어 업체들과 대등한 경쟁을 벌이거나 제휴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공의 관건은 두가지로 회사의 기술력과 글레이저의 외교력이다. 기술력은 인터넷 콘텐츠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리얼원’ 소프트웨어가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글레이저 본인의 외교적 능력이다. 최근들어 리얼네트웍스는 MS와 경쟁관계에 있는 AOL과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는 글레이저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 MS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어차피 넘어야 할 벽이고, 도전에 성공했을 때 글레이저와 리얼네트웍스는 업계에서 제대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