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의 CEO인 크레이그 배럿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CEO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하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그는 종종 3만피트 상공의 비행기 2등석에서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의 운명을 가를 의사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일년에 방문하는 국가만 30∼40개 국가에 달한다.
최근 배럿의 라틴아메리카 순방 일정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바쁜지 여실히 들어난다. 그는 칠레와 브라질에서 각각 14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회합에 참석하고 베네수엘라에서는 연사로 나섰으며 심지어 예정에 없던 볼리비아까지 들리기도 했다.
또 배럿은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의 CEO답게 마당발이기도 하다. 그가 만난 정치 지도자 명단에는 장쩌민 주석, 멕시코의 빈센트 폭스 등이 올라있다.
배럿이 이렇게 바쁜 가장 큰 이유는 수십년간 막대한 수익에 길들여진 투자가들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
이는 곧 62세의 공학교수 출신인 그가 노이스, 고든 무어, 앤디 그로브 등 3명의 전임 CEO의 그늘로부터 벋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반도체를 산업화할 수 있도록 기술돌파를 이뤄낸 노이스와 무어, 샌타클래라의 무명 기업인 인텔을 세계적 기업으로 변모시킨 그로브는 인텔은 물론 반도체 업계에서도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이에 비해 현 CEO인 배럿은 8만여명의 직원을 갖춘 완숙한 회사를 이끄는 최고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는 이들에 비해 떨어진다.
이에 대해 인텔의 한 전임 간부는 “그로브는 타고난 지도자”라며 “만일 (인텔이) 군대였다면 그는 ‘우리는 저 고지를 점령해야만 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며 모두다 참호에서 뛰어나와 그를 따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배럿에 대해서는 “그로브에는 못미치지만 인텔의 제조 인프라를 현재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라고 평가했다.
배럿은 인텔의 고질적인 칩 설계와 제조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로를 세웠지만 몇 번의 잘못 된 의사결정에 따른 경영실적 악화 때문에 적지 않은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와 관련, 머큐리리서치의 애널리스트인 딘 매캐론은 “인텔은 80년대들어서면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경쟁에 직면하기 시작했다”며 “성장은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그나마 매출은 유지해왔으나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한때 18달러 96센트까지 떨어졌던 인텔의 주식은 현재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전성기 때 수준에는 훨씬 못미치고 있다.
인텔은 배럿의 의욕적인 다각화 계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PC 수요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지난해 경기침체는 이러한 인텔의 아킬레스건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2000년 337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던 인텔은 작년에 불과 264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산되며 특히 3분기 순익은 전년 동기 대비 77%나 하락했다. 수익이 이같이 줄어든 것은 가격 경쟁이 치열해 졌기 때문이다. 배럿이 CEO로 등극할 당시 새 데스크톱 PC 칩은 900달러대에 판매됐으나 현재 새 칩은 400달러 이하에 판매된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인텔이 고전하는 것이 단순한 경기침체에 따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99년부터 2001년 전반기까지 인텔은 수많은 결함, 리콜, 출시 지연 등의 문제로 시달렸다. 또 고가 메모리인 램버스에 대한 배럿의 집착은 PC업체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경쟁사인 AMD의 비즈니스까지 도와주었다.
이에 따라 배럿은 지난 3년간 네트워킹과 통신 분야를 중심으로 한 35건의 인수합병을 위해 11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이같은 다각화 전략도 통신 시장 침체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배럿의 의사결정이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손실을 보고 있던 소비자제품 사업부와 스트리밍 미디어그룹, e커머스 사업부 등을 해체하고 온라인 서비스에 대한 추가 투자도 보류시켰다. 이 대신 PC 및 서버, 네트워크 장비, 이동전화 등 3개 분야에 중점을 두고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같은 사업 다각화 노력으로 인텔의 통신 및 무선그룹이 지난해 1∼9월 전체 매출의 약 19%에 해당하는 37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앞으로 인텔의 신규 사업은 기반을 대부분 해외에 두게 된다. 또 인텔은 이미 2000년 말 아시아 지역의 매출 비중이 북아메리카 매출 비중을 넘어섰으며 앞으로 이같은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배럿은 인텔 이후의 은퇴계획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러나 그의 정년은 이제 불과 3년이 남았으며 이미 후계구도도 가닥이 잡힌 상황이다. 그동안 인텔아키텍처그룹의 총괄매니저인 폴 오텔리니와 네트워킹 및 통신 사업부의 매니저인 신 맬로니가 차기 CEO로 경합을 벌였으나 최근 폴 오텔리니가 최종 낙점을 받았다. 폴 오텔리니가 인텔의 후계자 수업 코스인 사장 겸 COO로 임명된 것이다.
한편 배럿은 “그로브 회장이 회장직을 유지하면 나는 몬타나 또는 마자틀랜드로 여행을 가거나 패러세일링과 같은 것을 즐기게 될 것”이라며 “(은퇴 후) 나를 바쁘게 할 만한 많은 것들을 갖고 있다”고 말해 그로브가 이사회 회장직을 유지할 것임을 암시했다.
<황도연기자 dyhwang@etnews.co.kr>
경영성적표
크레이그 배럿 CEO
(리얼네트웍스)
B 리더십: 날카로운 면을 갖춘 교수 출신. 그는 누가 업무를 수행할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A- 비전: 98년 배럿의 사업 다각화 결정은 인텔을 하드웨어 강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다음의 우선 추진 사항은 판매와 해외로의 인프라스트럭처 확대다.
B- 업무수행: 다각화 계획은 충돌을 가져왔다. 인수는 실패로 돌아가고 신규 사업도 조기 실패했다. 인텔은 여러 제품의 리콜은 물론 일시해고까지 단행해야만 했다.
B+ 인지도: 배럿은 앤디 그로브,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등 3명의 반도체업계 거물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인텔의 연매출과 성장률
*설립연도: 1968년 *회계결산: 12월
*본사: 샌타클래라
*직원수: 86,100명
자료: C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