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자상거래 시장에 법률적 기초를 놓아 줄 것으로 기대되던 ‘EU 전자상거래 지침(e-commerce directive)’이 주요 회원국의 입법화 지연으로 실행에 난항을 겪고 있다.
최근 유럽 현지 언론들은 영국과 프랑스 등 대부분의 EU 회원국이 지난 17일로 예정돼 있던 EU 전자상거래 지침 실행 마감기한을 지키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마감기한을 지킨 국가는 15개 EU 회원국 가운데 독일·아일랜드·핀란드 등 5개국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기존 EU 전자상거래 지침이 수정 없이 각 회원국에 의해 실행될지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EU 전자상거래 지침은 미국에 현저히 뒤져 있는 유럽의 전자상거래를 촉진시키고 그 거래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만들 목적으로 지난 2000년 6월에 채택됐다. 이 지침은 EU 지역에서의 전자상거래 회사 설립에서부터 전자상거래 계약 내용의 타당성 유무 및 그 범위, e메일 등을 통한 소비자 광고, 전자상거래와 관련된 소비자 권익 내용 및 업체의 소비자보호 책무,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 등 중개업체의 기능과 책무에 이르기까지 거래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침은 그 성안 과정에서 각 EU 회원국의 격론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 주요 내용이 기존 각국간 상거래 규정의 차이를 상당부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침은 EU 지역에서 설립된 전자상거래업체는 각 회원국의 국내 법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가령 영국의 판매업체가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프랑스와 독일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나 사면 하나는 공짜로 얹어주는’ 할인판매를 영어로 광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광고는 오프라인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모든 제품 정보와 광고는 프랑스어로 표기해야 하며, 독일에서는 불공정경쟁방지법에 따른 할인판매의 제약이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침이 확정된 후에도 EU 회원국간 전자상거래에 대한 입장 차이가 여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유럽의회와 집행위원회에서는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개인 데이터의 전송문제나 각국간 온라인 판매에 대한 세금부과 문제 등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EU 지침의 실행 지연을 계기로 유럽의 전자상거래 발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가트너연구소는 컴퓨터 비즈니스 리뷰를 통해 유럽에 진출하려는 전자상거래업체는 현행법에 의해 부과되고 있는 업체의 책무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자상거래에 대한 EU의 법률적 프레임워크 자체가 불확실해진 만큼 일단 현행법에 의해 규정된 업체의 법률적 책무를 최소화해 놓고 그 다음으로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라는 조언이다.
물론 EU 전자상거래 지침의 실행 마감기한을 지키지 못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이른 시일 내 이를 실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정부는 올해 중순까지 이 지침의 요구사항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계획이다. 더욱이 이들 국가는 잠재적 소비자의 압력에도 직면해 있다. EU 지침의 실행 지연으로 소비자가 전자상거래에서 불이익을 당할 경우 이들은 자국 정부를 대상으로 EU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자상거래에 대한 EU 회원국간 입장 차이가 또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여전히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