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석 외국기업협회 회장 (y-shon@ti.com)
세계는 요즘 국경이 따로 없는 글로벌경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소리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230여개의 국가 가운데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지 않은 국가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글로벌경제시대의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은 각국의 다국적기업 지역본부 유치경쟁에서도 그 치열함을 엿볼 수 있다.
산업자원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홍콩에는 AIG·홍콩상하이은행·모건스탠리·필립모리스 등 200개 이상의 지역본부가 활동하고 있고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제너럴모터스·시티그룹·도이치텔레콤 등 944개에 이르는 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지난 97년 삼성의 굴삭기부문을 인수한 볼보코리아가 유일하다.
더욱이 지난해 WTO 가입 등 세계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2개의 지역본부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초라하며 나아가 우리 경제의 장래가 불안하기조차 하다. 이런 위기감 때문인지 최근 우리 정부도 다국적기업의 지역본부 유치에 적극 나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우선 현행 외국인투자촉진법을 고쳐 다국적기업이 아시아 지역본부를 우리나라에 설치하면 외국인 투자지역에 준하는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를 줄 계획이라고 한다.
외국인 투자지역으로 지정되면 7년간 법인세 및 소득세가 100% 감면되고 그후 3년간은 50% 감면된다. 이는 현재 다국적기업 지역본부에 10년 동안 법인세를 일반기업의 10%만 부과하고 있는 싱가포르에 상응하는 조치다. 정부의 이와 같은 노력은 비록 주변 경쟁국에 비해 때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환영하고 기대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 단기적인 처방에 치우쳐 걱정이 앞선다. 실제로 다국적기업의 지역본부 유치는 인센티브 제공과 같은 단순한 처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실 다국적기업들이 우리나라를 기피하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에 아시아 지역본부를 설치할 만한 환경, 즉 기업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우선 언어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같은 나라들은 영어가 필수 공용어기 때문에 외국인과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영어교육을 10년 넘게 받아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또한 각종 제도나 규정도 외국기업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외국기업이 법령에 따른 허가나 신고를 위해 또는 정부기관의 조사에 응하기 위해 정부기관에 영문자료를 제출하는 경우 해당기관에선 영문자료의 번역 및 공증을 요구하고 있다.
주변 경쟁국에 비해 높은 소득세 및 법인세와 복잡한 세율구조, 불투명한 세법 등 세제상의 문제 또한 다국적기업이 우리나라를 외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실례로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소득세율이 20∼25% 수준인 데 비해 우리나라의 소득세율은 최고 40%나 된다.
시대에 맞지 않는 노동법도 문제다. 종업원의 까다로운 해고요건 등 경직된 노동시장은 다국적기업이 우리나라를 꺼릴 수밖에 없는 주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시대에 맞지 않는 각종 행정규제와 기업간 불합리한 거래 관행, 주재원들의 불편한 생활환경 등 외국기업이 우리나라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은 곳곳에 산적해 있다.
우리는 기업들이 기회만 있으면 해외로 떠나려 하고 심지어 초등학생까지도 외국으로 유학을 가려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국적기업의 지역본부 유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국적기업 지역본부 국내유치는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에 급급하기보다는 더욱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접근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개선하고 한단계씩 국가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