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채권단이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마이크론은 인수조건으로 15억달러의 신규자금 지원을 요구했고, 하이닉스 역시 잔존법인(비메모리부문)에 부채탕감을 비롯한 1조원의 자금지원을 요구했다. 채권단은 박종섭 사장이 마이크론과의 5차협상을 마치고 40억달러에 근접한 협상안을 가져왔다는 소식에 한때 협상 종결의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협상안의 뚜껑이 열리자 튀어나온 갖가지 부대조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40억달러의 채권을 회수하려면 마이크론코리아에 15억달러, 하이닉스 잔존법인에 7억6000만달러 등 줄잡아 23억달러 정도를 신규지원해야 한다는 황당한 입장에 처한 것이다. 채권단은 부랴부랴 마이크론과 재협상하기로 하고 수정안을 마련중이다. 하지만 양측의 요구를 전면 거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마이크론이 인수후 국내에 설립할 마이크론코리아는 비록 미국계 회사이나 우리 산업에 엄연히 기여하는 국내기업이다. 더욱이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직원의 고용승계를 보장하고 신규자금을 시설투자에 쓰겠다고 하니 채권단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처지다.
채권 신속 회수가 급한 채권단으로선 마이크론도 만족할 수 있는 절충안을 이른 시일안에 만들어야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마이크론코리아만 지원하고 하이닉스 잔존법인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이닉스 주주의 90% 가량을 차지하는 소액주주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게 불보듯 뻔하다. 소액주주들이 힘을 합쳐 협상반대운동을 벌일 태세다.
채권단이 잔존법인에 대한 지원책을 제시하지 않으면 협상타결을 꿈꿀 수 없다. 채권단이 적어도 잔존법인에 대한 확실한 경쟁력 강화방안을 마련해야 주주들을 설득하는 명분이 선다. 잔존법인을 지원해도 반발을 잠재울 수 있을지 의문시될 정도로 소액주주들이 격앙된 상태에서 이를 외면한다면 채권단 스스로 발목을 잡히게 된다. 무엇보다 ‘외국기업은 도와주고 토종기업은 사지로 내몬다’는 국민 정서가 무섭다.
채권단은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면서 마이크론과 하이닉스, 소액주주들을 만족시키고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모범답안을 만들 수 있을까.
채권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나 IMF 이후 금융기관 주도의 기업구조조정이 총체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진다.
<산업전자부·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