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룡 인터넷기업협회장 krlee@auction.co.kr
고구려시대의 결혼 지참물 중에는 전쟁에서 죽었을 때 입을 ‘수의’가 있었다고 한다. 호전적이고 용맹한 고구려인들은 전쟁터에 나가 언제든지 명예롭게 죽을 준비가 돼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투쟁정신은 고구려가 역사상 최대 영토를 보유하고 막강한 국력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고구려 정신을 승계한 고려는 화합과 자유, 그리고 창의성으로 전성기를 누린 국가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화해와 정당한 전투를 통해 후삼국을 통일했고, 토호세력과 화합하기 위해 29명의 후궁을 거느리는 혼인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과부의 재혼이 허용됐고, 유산상속도 남녀평등이었다. 숭불정책을 편 역대 임금은 연등회·팔관회를 통해 군민일체의 화합정치를 도모했다. 이는 고려청자·팔만대장경·금속활자·화약 등 찬란한 문화를 일궈낸 창의력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정신이 오늘날 벤처기업의 문화로 재현되고 있다.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가 벤처기업을 잘 이끌 수 있는 당위성과 벤처산업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것일까.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화합경영과 창의력으로 발빠른 기술 개발, 자유경쟁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전쟁터와 같은 경영 현장을 누비는 벤처인의 도전정신은 옛날 고구려와 고려의 정신과 너무도 흡사하다.
이런 벤처 본연의 정신은 지난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새 활력을 불어넣는 기폭제가 됐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벤처기업을 둘러싼 각종 비리사건이 터진 이후 벤처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다. 벤처기업이 ‘신경제의 축’이라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벤처에 대한 투자심리가 위축되고 언론도 예전같지 않아 벤처를 경영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혹자는 이를 또다른 ‘냄비근성’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문제의식과 벤처를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최근 비리사건의 원인을 살펴보면 경영자의 모럴해저드, 경영능력이 부족한 벤처기업의 과욕, 사회구조적인 부패문화 등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원인은 물론 벤처기업의 책임이다. 화합과 자율, 창의성이라는 벤처 본연의 정신을 외면한 사이비 벤처경영인의 파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처기업의 책임만을 논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구조적인 부패문화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 문민정부 시절 IMF 경제위기를 촉발한 한보철강 사태는 과도한 재벌 중심의 정책과 부패에 둔감한 사회구조가 낳은 대표적 산물이다. 물론 그 전에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정경유착의 사례는 많았다.
그렇다면 벤처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전환되면서 과거와 유사한 비리가 재벌이 아닌 벤처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는 우리의 사회 내부에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의 사태를 두고 일부 벤처 경영인의 잘못만을 논한다거나 벤처 전반의 회의론과 벤처지원정책의 무용론까지 제기하면서 벤처의 순기능을 외면하는 현상은 분명 잘못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벤처기업의 자정 노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패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 개선을 위한 강력한 법제도가 보완돼야 하며, 벤처지원정책의 현실성 있는 수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려가 화합과 자유, 창의성이 있는 국가를 만들어 고구려 이후 융성기를 구가했듯 이제는 그 정신을 승계하고 이어나갈 벤처산업의 현실과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다시 한번 벤처 육성의 의지를 새롭게 해 또다른 부흥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