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편파 판정으로 촉발된 반미 정서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시민운동단체들이 앞장서 미국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할리우드 영화에 대처해 스크린쿼터제를 사수해야 한다는 영화계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심지어 월드컵 축구경기 때 본때를 보여야 한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요즘 우리 사회 최대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툭 털어놓고 얘기한다면 우리 사회가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행위 자체는 매우 이중적이며, 선망과 미움이 교차하는 양가적 감정으로 뒤범벅돼 있다. 반미 정서가 휩쓸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한켠에선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 구입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으며 조기유학 열풍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반미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시장경제와 경영의 투명성을 신봉한다는 미국 기업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깨는 것도 현시점에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미국 기업들이 우리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궁긍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미국 정가를 흔들고 있는 ‘엔론 게이트’와 타이코인터내셔널·IBM 등 공룡기업의 분식회계 의혹에 관한 외신을 접하면서 솔직히 허를 찔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엄정한 기업평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아더앤더슨 등 회계법인까지 분식회계에 한몫했다는 소식에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미국 업체로 대변되는 외국계 공룡기업이나 회계법인 등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가장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것이 국내 기업들의 투명성 문제다. 이들 외국계 기업의 눈에 비친 한국 기업은 분식회계와 비정상적인 영업 관행으로 얼룩져 있는 불투명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마당에 분식회계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미국 기업들을 보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환상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와 함께 경영의 투명성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를 실감한다.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문제인지 모르지만 최근 외신은 IBM의 분식회계 의혹과 함께 유럽의 집시 관련 단체가 독일 나치정권에 펀치카드기를 공급, 유태인과 소수민족 학살에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IBM을 제소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IBM이 납품한 펀치카드기가 게르만과 유대인을 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깨끗함을 지향하는 IBM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명예손상이다. 단순히 시스템을 납품했을 뿐인데 IBM이 나치에 협력했다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MS는 또 어떤가. 최근 9·11 테러사태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로 미국 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노암 촘스키의 입을 빌린다면 MS는 공적인 영역에 있던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상업화하고 독점화하는 기업에 다름아니다.
언뜻 보면 IT산업은 매우 가치중립적인 사업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보화나 글로벌화의 명분 아래 도입하고 있는 외국의 시스템이나 솔루션에 외국 기업들의 음험한 속셈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장길수기자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