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기러기 아빠와 연어족

 IT업계에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이다. 주로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 CEO 및 고위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시리즈 가운데 가장 ‘간 큰 남자’는 ‘아직도 자식들을 한국에서 학교 보내는 사람’이란다. 지독한 역설이긴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박장대소와 함께 정곡을 찌르는 블랙 유머라고 입을 모은다. 일반인들이야 “그게 뭐가 웃기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유머가 인기있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정서적 공감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기업체 중역쯤 되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계층에 편입되지만 회사일 빼고는 ‘자식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다. 대부분 입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수험생 한 두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설혹 아이들이 어리다 해도 엄마 뱃속에서부터 조기교육에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이 땅의 부모들로서는 늘 수험생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욱이 IT업계의 임원진이라면 유학파도 많고 최첨단 비즈니스 현장에서 세계의 흐름을 함께 호흡한다는 점에서 자녀교육도 훨씬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여기에 경제적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자연히 유학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부모치고 제 자식들을 지금과 같은 살인적 입시지옥에 내몰고 싶을까.

 그래서 경제적 여건만 허락한다면 너도 나도 조기유학을 보내는 것이 무슨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80년대만 해도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녀 조기유학이 이제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직급도 기업체 임원급에서 이제는 부장·과장까지 내려왔다. 여유가 없어도 일단 보내고 본다는 부모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자연히 ‘기러기 아빠’들이 속출하고 있다. 조기유학의 부담 탓에 아빠는 한국에 남아 돈을 벌고 엄마는 아이들의 유학 뒷바라지를 위해 함께 떠나간다.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이산가족이 이제는 교육이라는 새로운 이유로 양산되고 있다. 이런 판이니 기러기 아빠들에겐 간큰 남자 시리즈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러기 아빠들과는 정반대의 모습도 있다. 조기유학도 좋지만 한국사회에서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맥·학맥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대학입시를 앞두고 한국에 돌아와 과외수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연어족이다. 유학을 통해 ‘인간다운 교육(?)’을 받았고 언어능력도 습득했지만 외국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마이너리티의 삶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부모들이 기꺼이 입시지옥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강남에는 이들 연어족을 겨냥한 각종 전문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또하나의 사회 풍속도가 펼쳐지고 있는 셈이지만 원인은 모두 ‘교육’이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기득권 세력이 기러기 아빠와 연어족을 오가는 사이 한국에 남아있는 똑똑한 젊은이들은 고시촌으로 몰려가거나 의대에 편입한다. 이과 최고의 수재집단인 서울대 물리학과 학생들이 전공을 팽개치고 고시에 기웃거리고 공학박사들이 의대 편입시험에 매달린다. 이러니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은 쓸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고 연구개발은 엄두도 못낸다고 한숨만 쉰다. 그런데도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 이공계 병역특례 확대정책밖에 없다. 교육이 무너지는데 너무도 한가한 발상이다.

 지식정보사회 경쟁력의 원천은 사람이고 요체는 교육이다. 전자신문이 ‘사람이 경쟁력이다’라는 연중 기획시리즈를 내보내고 있지만 현장에서 부닥치는 벽은 역시 백년대계 교육의 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대선 시즌이다. 거창한 구호는 알 바 아니다. 기러기 아빠, 연어족만이라도 사라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통령 후보는 어디 없는가.

 <이택 정보가전부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