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숨은 손이라 불리는 케빈 컴프턴이 부각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 업체인 클라이너퍼킨스코필드 & 바이어스의 파트너인 컴프턴은 2주 전 몇몇 투자자들과 함께 산호세 유일의 주요 스포츠 프랜차이즈로 NHL팀인 삭스(Sharks)를 인수했다. 그는 하지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한 기자회견도 열지 않았다. 물론 이는 그를 아는 이들에게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클라이너퍼킨스의 동료인 비노드 코슬라 파트너는 “컴프턴은 매우 조용한 사람”이라고 전했다.
친구들은 삭스의 새 공동소유주인 컴프턴을 베일에 가려진 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발이 넓고 정치적으로 역동적일 뿐 아니라 가장 성공적인 벤처캐피털리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벤처투자 수익률 면에서도 미국내 20위 안에 든다. 그는 클라이너퍼킨스의 12명 파트너 중 코슬라와 존 도르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다. 미주리 출신인 컴프턴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한 뒤 실리콘밸리에 비교적 뒤늦게 진출했지만, 빠른성장을 보였다. 그는 대부분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보다 더 많은 세 차례의 홈런 투자를 터뜨렸다. 클라이너퍼킨스에 5억달러의 수익을 안겨준 산호세 소재 네트워킹 업체 오니시스템스, 각각 1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려준 마운틴 뷰 소재 인터넷 보안업체 베리사인, 플로리다의 컴퓨터 네트워킹 회사인 시트릭스시스템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와 자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꼽는다. 그는 멘로파크에 있는 사무실에 응답전화의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있는데, 가족이 첫 순위고 다음이 클라이너퍼킨스의 파트너들, 그리고 피투자업체 순으로 돼 있다.
컴프턴은 클라이너퍼킨스의 전통에 따라 관련업계라는 벽을 뛰어넘어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비영리 종교 조직인 페이스워크스의 위원이기도 한 컴프턴은 학교성적을 중시하는 청소년 스포츠 조직인 팝 워너의 축구팀 코치를 맡고 있다. 그는 학생들의 체력 및 인격 도야를 목표로 하고 있는 멘로파크의 코어 청소년 공연센터에 기금을 내기도 했다.
컴프턴의 정치적 커넥션 역시 대단하다. 부시 미 대통령의 선거 유세에 14만3000달러를 기부한 그는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 등 행정부에도 강력한 원군을 확보해 놓고 있다. 그는 애시크로프트 장관의 산호세 방문시 그림자처럼 동행하기도 했다.
컴프턴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반독점 소송과 관련해 애시크로프트 장관이 실리콘밸리의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도록 로비해 성공시켰다. 넷스케이프의 제임스 박스데일 전 CEO는 법정증언에서 정부 합의안의 장점에 대한 애시크로프트 장관의 견해를 인용했는데, 이 소스가 다름아닌 컴프턴이었다. 컴프턴은 미주리에서 컴퓨터 유통업체인 에머리소스의 창업 직원으로 입사해 이 곳에서 연간 매출이 7000만달러에 이르도록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지난 86년 에머리소스가 산호세 소재 컴퓨터 유통업체인 비즈니스랜드에 인수되면서 당시 27세이던 컴프턴은 산호세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컴퓨터업계는 당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컴프턴은 소비자들의 기호를 잘 파악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유력한 중개인으로 성장했다. 비즈니스랜드를 통해 물건을 팔려던 어떤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세빈로젠펀드의 스티븐 다우 파트너는 “모든 제품이 컴프턴을 통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비니지스랜드와 함께 제품을 출시했던 컴퓨터 회사 넥스트의 전 직원인 다니엘 루인은 컴프턴의 열정적인 근무자세에 대해 언급하면서 두 사람이 전국을 누비며 일을 하다가 한번은 자동차의 시동도 끄지 않고 비행기를 탄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당시 그렇게 서둘렀던 이유는 컴프턴의 아들이 생일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들과 딸이 있는 컴프턴은 새벽 4시라도 늘 가족과 연락했다. 루인은 현재 실리콘 밸리의 MS 책임자로 활동중이다.
컴프턴은 당시 비지니스랜드의 투자자였던 코슬라의 눈길을 끌었다. 코슬라는 컴프턴을 신생업체를 위한 아이디어를 내는 이른바 `재택 경영자`로 클라이너 퍼킨스에 합류하도록 초청했다.컴프턴이 아이디어맨은 아니었지만, 클라이너 퍼킨스의 파트너들은 나이가 당시 31세에 불과한 그를 파트너로 영입했다.
컴프턴의 첫 임무 중 하나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파산지경에 처해 있던 소프트웨어 신생업체인 시트릭스를 정상화시키는 일이었다. 컴프턴은 시트릭스를 경쟁 제품 출시로 위협하던 MS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정상화시켰다. 코슬라는 "컴프턴은 어려움에 빠진 기업을 과감하게 인수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컴프턴이 건 도박 중 하나가 지난 91년 클라이너퍼킨스의 짐 랠리 파트너와 함께 시도한 ‘모바일컴 프로젝트’였다. 두 사람은 휴대폰 보급이 크게 늘어날 것을 내다보고 10여개 이동통신 회사에 모두 5000만달러를 투자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하지만 너무 앞서나갔다. 수익은 올렸지만, 홈런을 치지는 못했다. 다우 파트너는 “전형적인 클라이너퍼킨스 스타일이었다”며 “초기에 선점할 경우 히트를 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컴프턴은 이 프로젝트에서 두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한 가지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고 나머지는 벤처캐피털이 중매업체처럼 핵심전략이 다른 피투자업체들로 하여금 제휴를 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같은 예로 노터블과 이오의 제휴를 들었다. 이오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 노터블은 전혀 새로운 시장을 찾아나설 수 밖에 없었다. 컴프턴은 당시 PC 위크의 한 기자에게 `뼈를 깎는 고통을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컴프턴은 클라이너 퍼킨스가 실리콘 밸리의 와이어리스 액세스에 투자할 때 보스턴의 그렉 레이에스를 영입해 이 회사를 맡도록 했다. 레이에스는 삭스를 같이 인수한 주요 투자자였다.컴프턴도 다른 벤처캐피털처럼 인터넷 거품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컴프턴은 코살라와 힘을 합쳐 산마테오 소재 광대역 서비스 제공업체인 브로드밴드 오피스에 투자했었다. 지난 99년 펀딩을 받은 이 회사는 1억1000만 달러를 까먹고 지난 해 문을 닫았다. 이 회사는 클라이너 퍼킨스의 최대 실패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회사는 한 때 회사 가치가 15억 달러에 달하고 700명을 고용했었다. 그러나 컴프턴은 이같은 열띤 분위기에도 조용히 침묵했었다.반면 코슬라는 CNNfn 프로그램에 출연해 BBO가 주니퍼 네트웍스, 세렌트 같은 수십억 달러 가치의 회사에 필적할만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컴프턴은 실제로 막후에서 움직여 왔다. BBO가 실패로 끝나자 그는 낙담한 한 직원을 위로하면서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너 퍼킨스도 채권자`라고 말한 것으로 당시의 인더스트리 스탠더드 기사는 전하고 있다.컴프턴의 다른 거품 시대 투자 실패 사례는 지금은 문을 닫은 리듬스 넷커넥션즈와 로직티어 등이다.
그는 삭스를 통한 하키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그냥 삭스가 좋아서 투자한 것 뿐`이라며 `경쟁을 체질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스탠리컵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자라면서 하키를 해본 적이 없지만 선수인 척 하는 것을 좋아했다. 삭스의 시즌 티켓을 갖고 있으면서 열광적인 팬이기도 한 컴프턴은 이 팀이 산호세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사생활에 대한 강력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삭스의 지분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벤처캐피털리스트인 조나단 페이버는 `이 과정에서 컴프턴이 몇가지 개인적인 일을 희생시켜야 했다`면서 `이런 점에서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코니 박 기자 conypark@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