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업계 사상 최대 규모인 휴렛패커드(HP)와 컴팩의 합병에 대한 주주들의 심판이 마침내 주주들의 손을 떠났다. 최종 결과는 몇 주 후에 나올 예정이지만 이미 칼리 피오리나 HP 회장은 예비집계를 근거로 승리를 선언해 놓고 있다.
지난 6개월 내내 세계 IT업계의 시선을 받아온 양사 합병 과정은 길고도 고통을 요하는 마라톤같은 것이었다. 실제 보스턴 마라톤을 두번이나 완주한 경력이 있는 합병 반대파 기수 월터 휴렛도 “마치 고통스러운 마라톤 같았다”고 피력했다.
작년 9월 4일 합병 사실이 처음 공개된 이후 잘나가는 듯한 합병 움직임에 빨간등이 들어 온 건 월터 휴렛이 갑자기 반대를 표명하고 나서면서부터. 이어 한달 뒤에는 또 다른 HP 창업자 후손 패커드도 “합병에 반대한다”며 휴렛 진영에 가담했다. HP측과 이들 창업자 후손들은 각각 매킨지 뉴욕 지부와 이니스프리M&A를 위임장 주간사로 선정하며 지난 5개월간 10억달러가 넘는 홍보비를 써가며 치열한 주주 확보 경쟁을 벌였다.
피오리나 회장의 경우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머무른 시간만 해도 10만마일이 넘는다. 피오리나에 맞서 휴렛도 개인비행기를 동원, 반대 주주 포섭을 위해서 때와 장소를 안가리고 주주들을 방문했다. 양측의 이같은 물불 안가리는 주주 확보 경쟁은 마치 정치판을 연상케 했다.
일부에서는 합병에 찬성하는 주주들에게 흰색카드를, 그리고 반대하는 주주들에게는 녹색카드를 주총 전에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빗대어 ‘녹색 대 흰색의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5개월 가까운 피말리는 마라톤에서 피오리나는 주주·애널리스트들을 상대로 한치 흔들림 없이 합병의 정당성을 홍보해 “과연 여걸답다”는 평판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양자간의 ‘험악한 싸움’에서 아쉬운 것은 인간경영의 대명사인 소위 ‘HP웨이’가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도 경영자와 직원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또 위기가 닥치면 감원 대신 전직원이 힘을 합쳐 이를 극복하는 HP웨이는 그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스한 인간미와 함께 흐뭇한 미소를 선사했다.
지난해 HP의 대규모 감원으로 한번 타격을 받은 바 있는 HP웨이는 이번 투표로 인해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19일(현지시각)에 열린 HP 주총에서도 합병 반대자들은 대부분 해고문제를 거론하며 피오리나를 당혹케 한 것은 그와 무관치 않다. 경기침체는 60년 넘게 유지돼 온 아름다운 전통인 ‘HP웨이’마저도 희생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국제부·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