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단상]이동전화 발전사

 ◆<홍성원 시스코코리아 회장 suhong@cisco.com>

우리나라의 자동차 무선전화는 1961년 8월에 차량전화 20대를 개통, 보급하는 등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15년이 지난 1976년 IMTS(Improved Mobile Telephone System)를 설치할 때까지 가입자가 348명에 불과할 정도로 발전이 미미했고, 사용자들도 대부분 장관과 청와대 경호실 및 정보부 등 특수기관에서 특수목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보편적 통신수단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자동차 전화의 공급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이 당시의 무선전화는 전혀 통신보안이 되지 않아 아주 쉽게 북한에 의해 도청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차량 무선전화의 활성화는 통신보안의 문제를 선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몇가지 큰 상황의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는 차량전화의 획기적인 기술적 발전인 휴대폰(cellular) 시스템이 개발되어 통신안보 문제와 경제성을 해결할 수 있었고, 둘째는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올림픽이 유치되어 무선통신의 수요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체신부는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해 ‘전파가 월북하는 것을 막는다’는 전제아래 안기부를 설득시킨 뒤, 한통으로 하여금 82년 12월에는 무선호출기, 1984년 5월에는 최신의 휴대폰 방식 자동차전화 3000회선을 개통하도록 해, ‘이동통신서비스’를 전담할 목적으로 1984년 3월 한통의 자회사로 설립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로 하여금 011 서비스를 시작하도록 했다.

 그러나 서비스만 전담하는 회사의 경영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첫째는 수수료 책정 문제, 둘째는 고객의 불만에 대한 책임 문제, 셋째는 수요와 동떨어진 한통의 투자계획 수립 등의 원천적인 문제가 계속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87년 전화 1000만대 보급으로 ‘1가구 1전화 시대’가 개막되면서, 통신시장 개방이라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한 조치로 통신사업의 경쟁 도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결과로 88년 4월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는 통신사업자로 지정되면서, 명실공히 통신사업자인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이통)’로 다시 탄생된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때 차량에 탑재하지 않고도 쓸 수 있는 개인이동전화가 상용화되면서 무선전화의 보급은 더욱 가속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