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선 논설위원 kspark@etnews.co.kr
국내 기업에 초비상이 걸렸다. 제품의 사소한 결함 하나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제조물책임(PL:Product Liability)법 시행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제조자의 고의·과실 책임이 입증돼야 손해배상을 했으나 오는 7월 1일부터는 무과실 입증 책임에 의해 제품의 결함과 손해, 인과관계만 입증되면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자칫하면 유방확대 수술에 삽입되는 실리콘를 제작한 다우코닝사가 부작용으로 피해를 본 소비자에게 30억달러가 넘는 금액을 보상해야 했던 것처럼 엄청난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만큼 소비자의 권리는 신장되고 제조업체의 책임은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 PL법 시행이 국내 기업에 주는 유무형의 부담은 엄청난 것 같다. 국내 생산품의 원가 상승과 신제품 개발지연을 우려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인력자원을 추가 투입해야 하는 등 자칫 우리 경제의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물론 예외는 없다. 전자·자동차·엘리베이터 등 완제품은 물론이고 부품과 원재료 등 모든 부문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동차의 브레이크 결함으로 사고가 났을 경우 완성차 업체가 배상하지만 브레이크가 설계와 달리 제작됐을 경우 부품사에 구상권을 청구하게 된다. 따라서 기업들은 설계단계, 협력업체 관리, 제조, 애프터서비스 등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PL법 시행이 주는 긍정적 효과가 없지는 않다. 제조물의 안전성과 소비자보호에 주력함에 따라 기업의 경쟁력 및 해외 영업력이 강화되는 부수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의 주요 기업이 사내에 PL 전담팀을 설치하고 일본업체들이 사후대응보다는 예방활동에 주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뒤늦게 발견된 결함이 기업 이미지를 훼손시킬 뿐 아니라 엄청난 피해를 야기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제조물책임(PL)법 도입과 기업의 대응’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삼성경제연구소는 세계 최대의 석면회사인 미국의 맨빌이 석면 질환과 관련된 소송으로 오랫동안 시달리다 소송비와 보상금 부담으로 파산한 사례를 들어 PL법의 무서움을 경고한 바 있다.
PL법이 시행되면 관련 소송이 급증함에 따라 기업경영의 위험성과 경영부담이 증가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또 소비생활의 질적 제고와 기업간 격차가 확대될 뿐 아니라 PL법 소송에서 결함 판정을 받으면 유사소송과 집단소송으로 이어지고,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배상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소비자 모니터링제 등이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제품 개발 초기에 문제점을 파악하면 대규모 소비자 배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제품 및 서비스 결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소기업이다. 이처럼 상황이 다급한 데도 불구하고 대다수 중소기업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느긋하다.
물론 지난해 20%대에 불과했던 기업들의 PL법 인지도가 50∼60% 수준으로 높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수천만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을 사치로 여기는 분위기인 것 같다. PL법이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려되는 상황이다.
신이 아닌 이상 안전하고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사고 및 분쟁시 대처방법과 해결책을 마련하는 한편 피해자로부터 책임 추궁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제는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