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 대한상사중재원장(jhk@kcab.or.kr)
“미국 퀄컴사는 지난 92년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한 한국측 파트너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로열티를 배분하라.”
지난 2000년 12월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원(ICA)의 이같은 중재판정은 우리의 첨단기술 수준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실로 통쾌한 판결이었다.
일반적으로 상거래시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는 길은 당사자간 협상을 통한 우호적인 해결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법적 구속력과 집행이 보장되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방법으로는 소송과 중재라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대부분의 경우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실정이다. 그럼 왜 퀄컴과 ETRI는 중재를 선택했을까. 아마 당사자들은 외국에서의 소송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 여러가지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첨단기술과 관련된 분쟁은 그 성격이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에 해당되기 때문에 해결과정에서 법리적인 측면뿐 아니라 기술적인 면과 거래관습 등이 필연적으로 검토돼야 한다는 데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같은 사건은 법원에서 법관이 판단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양측은 기술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제3자(중재인)의 판단을 원했고, 이들은 공동개발합의서(Joint Development Agreement) 체결시 이미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재로 해결한다는 ‘중재조항’을 삽입해 놓았을 것이다.
여하튼 이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도 정보통신과 같은 첨단 기술분야에서 세계 일류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첨단 산업분야에서도 분쟁이 많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그 해결방법의 한가지로 중재의 중요성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중재란 계약 당사자간 중재합의에 따라 법원에서 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당사자가 선정한 중재인의 판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반드시 계약서 체결시 먼저 ‘중재로 분쟁을 최종 해결하겠다’는 당사자간 명백한 합의가 요구된다. 그 내용에는 △중재가 행해질 장소 △중재를 진행하는 기관 △중재규칙 등이 명시돼야 한다.
우리 기업의 경우 국내기업간의 분쟁이 발생하면 당연히 국내에서 중재로 해결하려 하겠지만, 외국 기업간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에도 가능한 한 국내에서 우리 중재법에 따른 중재를 진행해야 경제적인 측면이나 절차 진행상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중재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자간 합의에 따라 체결되는 계약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분쟁은 대한상사중재원에서 중재규칙에 따라 중재로 최종 해결한다’는 내용을 계약서상에 기재하면 된다.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판정은 법원의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계약서에 사인할 때 조인식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한바탕 잔치라도 벌이는 듯 요란스럽다. 이런 분위기에서 계약서 한 귀퉁이에 ‘만약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재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중재조항을 삽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마치 이제 막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가 이혼시 재산분할 등에 대한 내용을 공증받아두는 격이나 마찬가지일게다.
미국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러스는 지난 2000년 자신의 신부인 여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와 결혼을 앞두고 ‘이혼시 매년 200만파운드를 지급하겠다’는 각서를 쓴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뿌렸다. 이는 더글러스가 전처와의 이혼 합의때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본 데 따른 것이었다.
우리 기업들만큼은 이같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겪지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