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투자자들, 통신산업에 등돌린다
최근 미국과 유럽 증시를 강타한 통신주 동반하락 사태를 계기로 통신산업을 바라보는 유럽 투자자들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돼 주목된다.
4월 둘째주는 미국과 유럽의 통신주를 보유한 투자자들에게는 악몽의 한주였다. 런던 증시의 황제주로 군림하던 보다폰의 주가가 하루동안 7% 이상 하락해 근 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것을 시발로, 미국시장의 AT&T 주가 또한 17년만에 최저치를 경신했으며, 파리시장에서는 프랑스텔레콤과 오렌지의 주가가 하루동안 각 5.6%와 7.2%가 급락하는 등 유럽과 미국의 통신주들 모두가 거듭되는 주가하락의 충격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통신주가 동반 급락하자 런던의 한 펀드매니저는 BBC를 통해 “통신업체에 대한 희망은 당분간 완전히 사라졌다. 유선시장은 이미 죽었고, 이동통신시장은 정체하고 있으며, 새로운 3세대 시장은 실현할 수 없는 꿈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통신업체들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실망감을 드러냈다.
유럽 증시에서 통신주들이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통신주 동반하락 사태는 여러가지 면에서 심상치 않다는 지적이다. 주가하락이 유럽 통신업체들 가운데 가장 실적이 뛰어난 보다폰으로부터 시작된데다, 이를 계기로 유럽의 투자자들이 통신산업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유럽의 투자자들은 더 이상 통신산업을 성장산업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SG시큐리티스의 증권분석가 트레산 맥카시는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이동통신산업은 불과 18개월 만에 성장산업에서 성숙기 산업으로 변모했다. 이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통신업계의 주가를 새로운 기준에서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간 통신업계의 주가가 현재의 수익성보다는 미래의 성장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형성돼 왔다는 점에서 이런 투자자들의 시각변화가 가져오는 주가하락 효과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통신산업이 투자자들에게 성장산업으로 비쳐지지 않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소위 통신기술신화에 대한 신뢰감 붕괴 때문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그간 유럽의 통신업체들은 3세대 이동통신 등 새로운 데이터서비스가 본격화되면 기존의 통화수수료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데이터서비스 개발노력은 지금까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 유럽 통신업체들이 제공하고 있는 2.5세대 이동통신서비스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며, 이를 만회하기 위한 3세대 서비스도 각종 기술적인 이유로 그 시행이 지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데이터서비스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보다폰의 경우에도 그 수입은 전체 수입의 1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간 유럽 통신업체들이 마구잡이로 매입한 자산들이 급속히 부실화되면서 투자자들의 실망감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번 통신주 동반하락 사태를 몰고 온 보다폰의 주가하락이 수십억 파운드에 달하는 이 회사의 자산평가손실액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유럽의 전화요금 규제가 한층 강화되고 있는 점도 투자자들로 하여금 통신산업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실제로 EU는 유럽 각국 정부를 대상으로 유선통신시장의 경쟁촉진과 그에 따른 서비스 요금인하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동통신업계에 대해서는 올해 말까지 EU 차원의 통화중계수수료 규제방안을 직접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다.
유럽의 통신업계는 이미 멀어진 투자자들의 관심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통신산업이 여전히 미래의 성장 산업임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유럽의 유무선 전화시장 가입자 수가 이미 포화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를 위한 유일한 길은 그들이 약속한 데이터서비스 등의 확대를 통해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 방법뿐이다.
이와 관련, 보다폰의 CEO 크리스토퍼 겐트는 향후 3년간 보다폰의 수입에서 데이터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최고 25%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밝혀, 통신업계의 새로운 수익기반 창출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지난 5년간 보다폰을 세계 최고의 이동전화업체로 키워낸 유럽 통신업계의 거물이고 보면 그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을 경시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전망에 기초해 선뜻 통신산업에 대해 투자를 재개할 유럽 투자자가 별로 없어 보이는 것 또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