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전공자들도 하이테크에 미래를 걸고 있다. 오리건주 힐스보로에 있는 세계 최대 반도체 메이커 인텔의 연구개발센터에는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 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부 연구원이 같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인류학자와 심리학자로 호스텔에서는 10대들과, 안방에서는 신세대 가족들과, 알래스카의 보트에서는 어부들과, 나바조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는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브라질에서는 빈민들과 섞여 지낸다.
이들의 임무는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 미래의 하이테크 잠재시장을 어떻게 개척할 수 있을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인텔의 토니 살바도는 “인텔 실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이테크 노력에 인간의 자각을 불어넣는 게 우리들의 일”이라고 소개했다.
인텔만이 이같은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휴렛패커드, 마이크로소프트, 제록스 등도 비슷한 종류의 연구원들을 고용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사라토가에 있는 인사이트64의 나단 브룩우드 분석가는 하지만 인텔은 일반 소비자들이 볼 수 없는 부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최종 제품을 만드는 이들 업체와 구별된다고 해석했다. 인텔은 최근 MS 빌 게이츠 회장이 차세대 유력 제품으로 꼽고 있는 핸드헬드 컴퓨터인 ‘태블릿 PC’의 지원을 위해 자사 연구원을 동원하기도 했다. 브룩우드 분석가는 “인텔이 늘 다른 반도체 메이커보다 자사 칩을 사용하는 최종 제품에 훨씬 깊이 관여해 왔다”면서 “이는 기존 시장을 빼앗자는 게 아니라 전체 파이를 키우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텔이 이같이 인문계 연구원들을 둘 수 있는 것은 세계 최대 칩 메이커로 자금과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인텔뿐 아니라 경쟁사들도 도움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텔의 살바도 심리학자는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특별한 기기나 제품을 마음에 두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밖에 나가 반드시 최종 사용자만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최종 사용자가 될 사람들도 관찰한다”며 “이들의 일상적인 행동, 필요, 열망, 욕구 등을 더 잘 이해하는 게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심리학 박사로 자신은 기술적인 감각은 전혀 없다고 시인한다. 그는 “반드시 제품을 만드는 게 목적은 아니다”면서 “기술개발에 영향을 미치는 게 우리 일”이라고 역설했다.
살바도 박사는 지난 95년 어린이들을 거느린 10명의 가족과 함께 며칠을 지내면서 그들의 일상적 행태를 엿본 적이 있다.
그는 가족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부엌이나 가족방에서 보내면서도 컴퓨터는 후미진 방에 놓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바도 박사는 이에 따라 무선으로 인터넷에 연결돼 쉽게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태블릿 PC같은 휴대형 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태블릿 PC가 인텔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게이츠 회장의 예언이 실현될 경우 엄청난 ‘대박’이 터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다고 모든 연구가 특정한 제품 개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살바도 박사와 인텔의 인류학자인 존 셰리는 97년 여름 가장 반컴퓨터적인 환경으로 알래스카의 한 생선 통조림공장을 찾았다. 두 사람은 이 공장에서 생선 무게를 달고 알래스카 수산육류국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한 오퍼레이터를 알게 됐다. 셰리 박사는 “그 오퍼레이터가 노트북 컴퓨터를 보트 선실의 출입구에 테이프로 묶어 사용하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연구원들은 결국 이 공장에서 모든 계산과 보고서 작성을 자동화하는 것은 물론 신뢰할 수 있는 무선 네트워크에 대해 더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최근의 프로젝트는 여행하는 젊은이들이 랩톱 및 무선 컴퓨팅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아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인텔의 켄 앤더슨 디자인 인류학자는 내년에 포틀랜드의 호손 호스텔에서 손님들과 시간을 함께 보낼 작정이다. 그는 “미래를 위해 19세기 과학을 이용하는 게 우리 일”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살바도, 셰리, 앤더슨 등 인텔의 인문학자 그룹은 하이테크와 인문학의 환상적 궁합을 위해 계약 등 비즈니스에 바쁜 회사의 다른 중역과 마찬가지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코니박기자 conypark@ibiz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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