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일 21세기정보통신대표 david@21telecom.co.kr>
‘장고후악수(長考後惡手)’.
오랫동안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 오히려 잘못된 결정이었을 때를 이르는 바둑의 경구다. 공격과 수비의 지혜 싸움이 끝없이 어우러지는 바둑의 우열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누가 더 치밀하게 읽어 내느냐에 있겠지만 수준이 엇비슷한 상대끼리의 실제 게임에선 누가 더 큰 실수를 안 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선지 바둑의 경구나 용어를 살펴보면 눈 앞의 이익을 노리다 오히려 더 큰 손해를 초래한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을 비롯해 덜컥수, 노림수, 패착 등 실수를 경계하는 것들이 많다.
평소 바둑을 즐기는 나도 그렇다. 정확한 수 계산에 의한 승리보다 상대방의 실수로 승리를 챙기고선 환호하기도 하고, 다 이겨놓은 게임을 막판 끝내기에서의 패착으로 상대방에게 승리를 헌납하고 허탈해하기도 한다.
정보기술이 발전을 거듭할 때 바둑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언제쯤 컴퓨터가 인간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둘 수 있을지에 대한 가벼운 얘기들이 오가곤 했다. 초기에는 컴퓨터의 제한된 처리용량 때문에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경제성’만 확보되면 얼마든지 인간과 대결이 가능한 바둑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상황이 됐고, 실제 상당한 수준의 바둑 프로그램이 개발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수 한수 바둑 돌을 둘 때마다 모든 인간적인 실수를 배제한,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이익이 되는 수를 정확하게 두는 ‘기계적 플레이’ 차원에서나 가능할 뿐 기쁨, 슬픔, 분노, 좌절, 욕망 등 변화무쌍한 감정이 매 순간 투영돼 ‘장고후악수’나 ‘덜컥수’를 두고선 회한을 쓸어 내리는 ‘인간적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 몇년 사이 정보통신기술의 화려하고 급속한 발전은 우리의 상상력을 앞질러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사회적 개방성의 예상치 못한 확대에 놀라기도 하고 ‘익명성’의 그늘 아래 살가운 인간성이 메마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때문에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는 나 역시 바둑을 둘 때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기계’에 인간의 혼이 깃들게 할 것인지 고민한다. 축도 모르면서 바둑을 둘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