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월드]유럽-"EU 산업규제 물줄기 바꿔라" 다국적기업들 `로비전쟁`

 최근 첨단 산업분야를 중심으로 EU의 강도 높은 기업 규제책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EU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다국적 기업들의 로비전 또한 치열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돼 주목된다.

 월스트리트저널유럽은 전자·통신·생명공학·화학 등 첨단분야에 대한 EU의 규제책이 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기업표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EU가 유럽통합이라는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미국의 기준을 훨씬 능가하는 강도 높은 규제책들을 내놓음에 따라 세계 전지역에서 공통의 기준을 가지고 영업을 할 수밖에 없는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기업책무를 한단계 더 고양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스의 EU담당 로비스트 마자 웨셀스는 “20년 전 미국기준에 맞춰 제품을 만들면 세계에 내다 파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기준은 세계 저 편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EU가 내놓은 기업 규제책들은 미국기준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예상밖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EU는 모든 전자제품의 재활용 책무를 생산자에게 부담시키는 전자폐기물처리법을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새로운 통신데이터보호법을 채택해 온라인 영업을 하는 웹사이트들이 고객의 컴퓨터에 쿠키(cookies)를 설치할 경우 의무적으로 고객의 동의를 받도록 명문화했다.

 또한 최근에는 스팸메일 차단을 목적으로 기업의 e메일 광고를 대폭 제한하는 내용의 새로운 e메일 관련법안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생명공학과 관련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들어 있는 모든 제품에 그 내용물 표기를 의무화하도록 만들었다. 화학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현재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3000여 화학제품의 위해여부를 정밀 재검사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처럼 EU의 기업 규제가 강도를 더해가면서 이를 저지 또는 약화시키려는 다국적 기업들의 로비 또한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AOL이나 로이터그룹 같은 대기업은 EU의 통신데이터보호법 개정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객들의 비밀번호나 언어사용습관 등을 자동으로 호스트 컴퓨터에 알려주는 쿠키 사용이 벽에 부딪힐 경우, 소비자들의 웹사이트 이용속도가 그만큼 느려져 온라인 영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아마존 등 온라인 소매업계 역시 EU의 새로운 e메일 관련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정계 인사들을 포함한 연합전선 구축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는 최근 10000여명에 이르는 로비스트들이 전세계 1400여 다국적 기업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난 92년 EU가 처음으로 유럽 단일경제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을 당시의 로비스트 수가 수백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EU가 이런 다국적 기업의 로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EU는 지난 98년 유럽의 온라인 소비자 정보보호를 위해 필요할 경우 미국 업체와의 일체 e메일 교류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이런 위협 앞에 대부분의 미국 온라인 업체들이 EU가 요구하는 수준의 소비자 보호장치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다. 점증하는 기업들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향후 EU의 규제가 약화되기보다는 강화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미다.

 물론 EU의 규제가 강화될 경우 미국정부가 이에 본격적인 제동을 걸고 나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모든 산업활동을 미국기준에만 맞추어 수행해 오던 국제경제의 관례가 거대 유럽연합의 등장으로 첨단산업에서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