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지난해 최악의 불항 속에서도 매출액이 100% 이상 늘어난 리버스톤 네트웍스 본사 전경
“고객관계관리(CRM)와 같은 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정보기술(IT) 제품 수요는 최근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및 통신서비스 제품 수요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리콘밸리 한복판 샌타클래라에 있는 라우터 업체 리버스톤네트웍스의 로뮬러스 페레이라 사장(36)은 시장전망을 묻는 질문에, 반가운 목소리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던 조금 전의 모습에서 180도 바뀐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같은 상황은 실리콘밸리내 다른 업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했다. 세계 IT업계가 최악의 경영난을 겪었던 지난해에도 2000년에 비해 100% 이상 매출이 늘었다던 리버스톤조차 이런 지경이라면 실리콘밸리의 다른 업체들은 돌아보나마나가 아닐까. 더욱이 페레이라 사장의 말은, 앞서 만났던 이 지역 IT업체 관계자들의 “불황터널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하소연을 들은 직후였다.
페레이라 사장은 리버스톤이 대도시 지역네트워크(MAN)용 라우터 시장이라는 틈새시장을 대상으로 아웃소싱을 적절히 활용했으며 어려운 기간에도 인재 중심의 경영을 펼친 결과 불황을 어느 정도 헤쳐갈 수 있었다고 회사의 ‘겨울나기’ 전략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리버스톤 역시 흔히 말하는 ‘운칠기삼’에 몸을 맡겨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 지역 업체들은 틈새시장을 찾는 것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신문은 실리콘밸리 200대 기업의 지난해 매출이 2000년보다 6.6% 줄어들었다고 보도하면서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업체는 ‘당초 예상대로’ 하이테크 분야 업체로 매출은 17.2%나 줄었다. HP는 예외로 하더라도 인텔·시스코시스템스·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매출은 21% 이상 떨어져 최근 몇년 사이 가장 큰 폭의 매출 감소를 보였다. 올해도 양상은 별차이 없어 이 지역 하이테크 업체들의 매출성장률은 한자릿수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면 슈퍼마켓 체인인 세이프웨이나 의류업체 갭 등 유통 및 제조업체와 같은 전통기업들은 불황속에서도 호조를 보였다. 실리콘밸리 주민들 사이에서 “지역 경제가 하이테크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는 푸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라는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칼만 인터넷으로 대체하면 현재 실리콘밸리를 그대로 표현하는 경구 같았다. 물론 자기혁신 노력을 게을리한 업체들에 주로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시장변화를 읽지 못하고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업체들은 빠르게 도태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흐름은 감지할 수 있었다. 크로니컬은 200대 기업을 분석하면서 매출 증가율 상위를 소규모 기술업체들이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상장된 페이팰과 생명공학업체 테라센스·시오스 등 유명도가 낮은 기업들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닷컴기업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미 채워지고 있었다.
<실리콘밸리(미국)=서기선기자 ks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