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지난 5월 31일 일본 경제계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무디스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2’로 무려 2단계나 낮춘 것이다.
한국을 IMF체제의 수렁으로 빠뜨린 직격탄이 신용평가기관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있었음을 상기하면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무디스가 일본에 내린 ‘A2’는 신흥경제국인 칠레보다 낮은 수준으로 폴란드, 남아프리카와 같은 랭킹이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의 자존심이 상처입은 것은 물론, 실제 일본 재정상태에 대한 짙은 의구심도 일어나게 하는 대목이다.
무디스측은 일본의 신용등급을 낮춘 이유로 일본 정부의 재정 적자가 거액에 달하는데다가 일본 현 정권은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정책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점을 첫번째로 꼽았다.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짊어지고 있는 정부부문 채무는 올해 연말까지 약 700조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4배에 달한다. 90년대초 국가신용등급이 ‘A1’까지 떨어졌던 이탈리아가 당시 GDP 기준 1.2배의 채무잔고를 갖고 있었던데 비하면 상당한 수치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디스를 비롯한 3대 신용평가기관에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이 과연 적절하게 평가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의서를 보내는 등 공개적으로 항의 표시를 하고 있다.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규모를 갖고 있는데다 같은 국가신용등급인 폴란드 등에 비해 1인당 GDP가 무려 10배나 많은 점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국채의 경우 95%가 국내에서 소화되고 있는 만큼 채무불이행(디폴트)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여기다 700조엔 정부 부채의 2배 규모인 1400조엔에 달하는 개인금융자산, 세계 1위의 대외순자산잔고 등은 부채 전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시장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모양새다.
무디스의 신용등급 조정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31일 오후 당시와 비교해 엔화, 주가, 국채 모두 흔들림없이 평상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발표 당시인 31일 오후 현재 일본 10년물 국채의 연이율은 1.390, 달러당 엔화가치는 123엔 80전, 닛케이평균주가는 11875.79엔이었다. 등급 하락의 여파를 확인할 수 있는 1주일이 지난 6일 현재 마감을 기준으로 국채는 오히려 장기금리가 1.365로 하락(국채가격의 상승)했고 엔화가치는 1달러당 124엔81전∼86전을 유지하고 있다. 닛케이평균주가 역시 11574.94엔으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무성은 이번 국가신용등급 하락에 의해 상처입은 자존심을 치료라도 하려는 듯 오는 21일부터 약 한달간 텔레비전, 신문 등 광고를 통해 ‘안전한 국채’를 대대적으로 선전할 예정이다.
여름철 보너스 시즌을 앞두고 일반 샐러리맨들을 타깃으로 한 이번 광고에는 영화배우 후지와라 노리카가 전면에 나선다. 후지와라 노리카는 한일 양국의 교류 활성화를 위해 생긴 ‘2002년 한일 국민 교류의 해’ 일본측 친선대사를 맡아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다. 이번 광고에 들어갈 비용은 3억5500만엔으로 알려졌다. 일부 현지 언론은 광고비용으로 정부채무 반환에 보태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신용평가기관의 국가신용등급이 여러 나라의 존폐를 위협했지만 이번 일련의 상황들은 ‘썩어도 준치’인 일본 경제가 일개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좌지우지될 만큼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hcsung@etnews.co.kr>
일본의 국가 신용도 추이
98년 Aa1
2000년 9월 Aa2
2001년 12월 Aa3
2002년 5월 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