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동 보보스타EMS상사 대표 kdkim@bobos.co.jp
약 3년 전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세계적인 수요 불황으로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다. 사상 유례 없는 위기에 맞서 일본 자동차업체들은 과감한 구조개혁과 조직축소, 부품조달체계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도요타, 혼다 및 닛산은 지난해 미국의 빅3를 가볍게 따돌리고 사상 최고의 흑자를 기록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자동차업계의 성공담과 달리 일본의 전자 메이커는 대부분 작년도 적자를 기록하며 실적부진에 빠진 상태다. 소니, 히타치 등 간판급 전자업체들이 왠지 손발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는 일본의 전자업계가 세계적인 시장구조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전자산업의 회생에 주요 변수인 엔화 환율은 자동차업계의 실적호조로 계속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때 일본의 전자산업은 지난 시절 생산현장에서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탄생한 대형 전자생산전문회사(EMS)의 영향으로 큰 도전을 받고 있다.
솔렉트론, 플렉스트로닉스, 셀레스티카 등 미국계 대형 EMS 업체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해가는 기세는 실로 무서울 정도다. 일본의 전자 메이커도 생산공장 통폐합이나 재편을 통해 미국식 EMS 제조전략에 대처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잘 안되는 상황이다.
전통적으로 물건 만드는 장인정신을 소중히 여겨온 일본의 전자업계가 오늘날 이같은 위기에 빠진 것은 얼핏 이해가 안가는 현상이다. 이같은 산업 대역전은 지난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과거 오일쇼크나 초엔고 시절도 극복하며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냉전시대 일본에 산업경쟁력이 뒤지자 ‘국가 전체의 최적화’ 이론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 미국 전자업계는 부가가치가 비교적 높은 연구개발, 마케팅 및 브랜드 관리, 디자인 등에 경영자원을 집중투입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생산부문은 과감히 통폐합해 전자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였다. 자사의 핵심역량 분야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아웃소싱을 통해 간접비를 대폭 줄인 것이다. 90년대에 접어들자 부가가치가 낮아 철수하는 데만 급급했던 미국내 전자제품 생산공장은 대형 EMS의 탄생으로 규모를 확대, 재차 소생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자업체는 상대적으로 가능한 한 모든 생산과정을 자체 해결하는 데 주력했고 아웃소싱은 최소한에 그쳤다. 한때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 전자업계가 이런 딜레마를 예상했다면 미리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을 것이다.
약 3년 전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는 폐쇄적인 부품조달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 자동차부품업계에 손을 내민 바 있었다.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차량에 국산 자동차부품이 대량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호기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자동차부품업계는 완성차업체의 위협에 눌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이제는 한국의 자동차부품업체가 일본 자동차업계의 문을 두드려도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미 다른 나라들과 부품조달체계가 정착됐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전자부품업계는 3년전 국내 자동차부품업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부품조달체계를 국제화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던 한국 전자부품업계에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국산 전자부품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일부 분야에서 세계적인 품질수준에 도달한 상태다. 문제는 어떤 업체가 무슨 전자부품을 잘 만드는지를 해외에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개별 중소부품업체가 기라성 같은 외국계 대형 전자업체를 상대로 마케팅과 품질, 납기보증면에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국내 부품업계의 EMS 바람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한국이 독자적인 EMS산업 정착에 성공한다면 국내 중소 부품업체가 일본, 미국의 대형 전자업체를 통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월드컵 16강 이상의 대이변을 낳을 것이다.
일본에서 사업하는 필자 입장에선 월드컵 축구 못지 않게 실물경제서도 조국이 선전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